중세철학 [한] 中世哲學 [영] medieval philosophy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를 주축으로 하는 철학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말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세 철학은 그리스 · 로마 초기의 고대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점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전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유일의 절대자요 세계와 우주의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호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이윽고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난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호교(護敎)의 방패로서 출발하였다. 그리스철학은 최초로 교부학(敎父學)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피론(Pyrrhon)이었다. 플라톤철학은 그를 중개로 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공통사상이 되어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계승되었다. 보에티우스(Boethius)는 플라톤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제저작을 소개하고 중세철학의 기본적 용어와 개념의 대부분을 갖추었다. 최고 존재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질료적 피조물(質料的被造物)에 이르는 세계의 제존재의 질서를 신 플라톤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세계상(世界像)으로 종합 정리한 디오니시우스(Dionysius Areopagita)는 그 후의 중세적 세계적 세계관의 윤곽을 제공하였다.

스콜라철학 시대가 되자 논리적 요구가 더욱 고조되고 신앙에 가능한 한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신학의 학적 정비(學的整備)가 적극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해를 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ctum)이라는 안셀모(Anselmus)의 입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3세기에는 풍부한 그리스철학의 문헌을 가진 아라비아 문화권의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더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에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적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이 방면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 때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중세철학이 사용한 제2의 논거인 관찰 · 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노가 치체로를 통하여 배웠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내면성이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계시나 종교상의 권위를 논증을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대개 교회가 승인한 사항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스콜라철학 시대에는 교부,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철학은 이와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의하여 나타나는 진리를 상호 모순되는 일 없이 조화시키려 기도함으로써 고대와 근대 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 논증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제약도 있었고, 또 철학이 ‘신학의 시녀’로서의 역할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철학은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그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동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 ·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은 중세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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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한] 中世敎會 [라] Ecclesia Medii Aevi [영] Medieval Church

대체로 476년 로마제국 멸망으로부터 문예부흥기까지 약 1,000년에 걸친 가장 그리스도교적이었던 서양사의 시대개념. 이 개념은 고대와의 결합이라는 문예부흥 고유의 의식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의해서 고대와 근대의 중간에 위치한 시대를 의미한다. 종래는 이 시대를 고대와 근세의 중간에 있는 쇠퇴기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서양문화와 여러 민족공동체의 소장시대(小壯時代)로 보는 적극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그 가치판단은 중세에서의 교회활동에 대한 견해에 따른다. 왜냐하면 교회의 활동이 대단히 중요하며, 중세는 서양사에서 교회적 시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는 1500년경 교회적 통일이 무너짐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중세에 교회가 지도적인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비잔틴과 이슬람에 대하여 유럽의 통일적 연대성(連帶性)의 중심을 이루었던 까닭이다. 교회는 또 고대문화의 전통을 전달, 부흥시켰을 뿐 아니라, 게르만민족과 슬라브인 그리고 헝가리인까지 개종시킴으로써 전세계를 지도하는 사명을 띠고, 그리스도교적 기반 위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새 문화, 즉 근대적 유럽의 국민 · 국가 · 도시와 학교의 원천이 되는 문화의 창조자가 되었다.

중세는 로마를 기반으로 하는 게르만 민족의 국가형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가 앵글로색슨과 서(西)고트족에 기울인 노력, 카롤링왕조 최초의 왕인 피핀의 대관을 위한 교황 스테파노 3세의 여행, 중세초기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룬 칼 대제(大帝)의 대관식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오토 1세(재위 : 936∼973)에 의하여 부흥된 교황의 영광, 이슬람 교도의 지중해 및 피레네반도(半島) 지배를 좌절시킨 십자군과 봉건제도, 고딕, 스콜라학 등의 빛나는 성과는 모두 중세의 절정기를 말해준다. 이 시대의 유럽 여러 민족은 교황권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 절정기를 이룬 것은 인노첸시오 3세(재위 : 1198∼1216) 때였고, 그것은 슈티우펜왕조(王朝)의 붕괴와 보니파시오 8세(재위 : 1294∼1303) 시대의 교황권 쇠퇴기까지 계속되었다.

14∼15세기는 중세말기로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지고, 도처에서 도시의 화폐경제가 시작되었으며, 봉건제도와 스콜라학이 쇠퇴되는 반면, 인문주의(人文主義)와 문예부흥이 활기를 띠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중세적 정신의 외적 표현(外的表現)은 962년 오토 대제에 의해 세워진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었다. 이 명칭에는, 그 문화를 형성하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즉 ‘신성’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교적인 요소가, ‘로마’라는 말에는 고대의 요소가 표현, 그리고 ‘독일’이라는 말에는 게르만적 요소가 표현된 것이다. 이 제국은 게르만인의 지도 아래 하나의 연맹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을 그리스도교적 여러 민족의 대가족 가운데 독립된 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도덕적 모든 힘의 원천이요, 여러 게르만민족에 대한 고대전통의 전달자였다. 교회는 게르만민족을 교육시켜 위대한 정신문화를 창조케 하였는데,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특한 것이었다. 왜냐 하면 이 문화는 게르만적 민족성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중세를 통하여 국가의 사명은 평화와 그리스도교적 질서의 확립에 있었으므로 국내에서는 법의 보장과 불법에 대한 징벌, 국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교적 문화공동체와 교회를 방위하는 데 있었다. 중세의 국가는 종교적 견지에서는 법과 질서의 구가였고, 문화적 사명은 간접적으로만 수행되었다. 중세의 신앙은 세계와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현실을 보편주의의 경건성을 가지고 보는 동시에 자연적인 계급적 질서에도 순종하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보편주의는 각 영역을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와 일치된 것으로 보았다.

교권과 정권, 교황권(敎皇權)과 황제권(皇帝權)이라는 두 권력의 상하관계는, 교권이 우월한 위치에서 품위와 사명을 갖는 신앙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이 두 권력의 상호관계에 대한 근본원칙 사상과 실제적 정치적인 관계는 교황과 황제간의 격렬한 이론적 정치적 투쟁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겨우 이룩된 유럽의 통일성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중세의 보편주의는 제권사상(帝權思想)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적에 대한 십자군의 투쟁을 위해서 그리스도교 민족의 협력을 호소하였지만 민족국가의 대두로 말미암아,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중세말기에는 이슬람 교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통일사상의 무력성을 광범하게 드러냈다.

은둔적 수덕(修德)사상은 문헌에 잘 표현되어 있었으나 중세에 극히 존중되었던 복음적 권고는 학설에도, 교회의 성성(聖性)이라는 이상에도, 그리고 신학적 도덕론에서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적 목표에 대한 초자연적 목표의 우위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정신적 가치의 우위는 항상 인정되었다. 교회에 의한 경제윤리의 형성 역시, 중세적 가치질서의 단계적 구성에 따르는 것이었다. 재산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고 전체에 봉사해야 되며 타고난 신분에 알맞아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매매에는 적정가격(instum pretium)이 요구되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은 그 신분에 맞는 생계, 즉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 이행하는 물질교역(交易)의 변화에 맞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적 사회적 관계들에서 조정되지 않은 점이나 또 가능성에 대해서는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작용하는 카리타스(Caritas)가 그것을 보완하였다.

중세문화의 평가에서는 중세의 실제적 역사상(歷史像)과 인류문화의 목표나 가치를 구별해야 된다. 중세라고 해서 “이것이 이상적인 시대다”라고 주장한 일은 없었다. 중세의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부패와 타락 때문에 말세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특히 말기에는 대이교(大離敎)의 혼란, 각 계급간의 적의(敵意), 국내전과 알력, 고문과 마녀재판(魔女裁判) 등에 의해 음산하였다. 중세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시대의 발전은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는 멸망되고 만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특성을 발전적으로 보존하면서 새로운 실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을 확립한 것이다.

중세는 국가와 교회의 지도 아래, 고대의 유산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부터 새로 형성된 문화공동체로 만들어냈다. 이 때 교회는 천주의 은총의 관리자로서, 그리고 고대문화의 유산의 소유자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교황과 황제간에 실제의 정치분야에서 권한문제로 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문화적 공동체는 인간을 하느님의 편에서 이해하고, 그 인격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만인을 하나의 정신적인 유대로 통일하였다. 하느님의 권위는 존재와 선(善)의 질서에서 최고로 인정되고, 따라서 모든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왔다. 구원은 모든 죄를 사하고, 교회를 통하여 전해진 은총은 질서를 회복하였다. 그런 중세의 인간, 세계, 하느님에 대한 견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광범한 저서 속에 철학적 신학적으로 가장 위대하게 표현되어 있다.

설사 중세가 이 위대한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성인과 영웅, 남자와 여자의 영웅적 활동에서, 그리고 단체적으로는 자선시설, 길드(guild), 대학 등에서 많은 모범을 남겼고, 그 일부는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불신앙은 인간의 모든 이상을 구현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그 바탕을 앗아가는 것이고, 자본주의적 지배욕이나 착취와 결합된 극단의 국민적 이기주의는 인간의 정신적 통일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중세의 교훈은 국제질서와 국내질서의 훌륭한 표본으로 새로운 광채를 발휘할 것이다.

[참고문헌] G. Schnurer, Die Anfange der abendlandischen Vlkergemeinschaft, 1932 / 아우구스트 프란츠 著, 최석우 譯, 敎會史, 분도出版社,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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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백의 [한] 中白衣 [라] superpellicium [영] surplice [관련] 장백의

장백의를 조금 짧게 변형한 것으로 성직자들이 미사와 행렬 등 성사(聖事)집행 때에 수단 위에 입는 옷. 길이가 무릎까지 오며 소매 폭이 넓고 소매 끝과 아랫단의 수(繡)가 놓여져 있거나 레이스가 달려 있거나 아무 장식 없는 것이 있다. 장백의와는 달리 띠 없이 입는다. 12세기경에 로마에서 처음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중백의는 장백의 대신으로 입을 수 있으나 장백의 위에 제의(祭衣)를 입는 경우에는 장백의 대신 입을 수 없다. (⇒) 장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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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바위 [한] 僧岩

순교자 묘소. 일명 ‘치명자산’이라고도 하는 중바위산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동정부부 이순이(李順伊)와 유중철(柳重哲)을 비롯한 신희(申喜, 시어머니), 이육희(李六喜, 시숙모), 유문석(柳文碩, 시동생), 유중성(柳重誠, 시동생) 등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박해가 누그러졌을 때, 유중철의 아버지 유항검(柳恒儉), 삼촌 유관검(柳觀儉)의 유해와 함께 유씨의 선영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묻혔다가 1920년 전주본당 라크루(Marcellus Lacrouts, 具) 신부가 유항검 형제들의 유해를 제외한 여섯 순교자의 유해를 중바위 상상봉에 이장하였다. 전주 전동교회 성모회에서는 큰 화강암의 십자가를 세워 전주시가에서 늘 보이도록 하였다. 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 주교가 말한 바대로 ‘전 조선 순교자 중 우뚝 솟은 하나의 진주’이다. 그리고 이순이의 묘는 수많은 기현상(奇現象)과 일화를 안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기념 인천교구 준비위원회, 한국 천주교 성지, 1982 / 샤를르 달레 原著, 崔奭祐 · 安應烈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1979 / 이충우, 한국의 성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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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림동본당 [한] 中林洞本堂

1887년 서울의 문밖 수렛골(순화동)에 명동(종현)본당 산하의 공소(公所)로 설립, 1890년 명동본당 주임 두세(J. Doucet) 신부가 합동(蛤洞)에 성당대지를 마련, 1892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 성당인 약현본당을 준공시켰다. 이보다 앞서 두세 신부는 5월에 약현본당 초대 주임으로 정식 부임함으로써 서울에서 둘째 번 본당이 발족되었다. 약현본당 관할의 공소들은 경기도 일대를 위시하여 멀리 송도(松都, 開城)를 지나 황해도 배천[白川]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깔려 있었다. 본당의 교세는 날로 늘어나서 1901년에는 송도(개성)공소, 1905년에는 행주(幸州)공소를 각각 본당으로 승격, 분리 독립시켰다. 또한 성당 구내에 1901년 여학교를, 1906년에는 남학교를 건립하였다. 1917년 두세 신부가 병사함에 따라 2대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부임, 성당 내부를 전면 개수하였다. 1926년 3대 주임으로 한국인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부임, 1927년 가명(加明)유치원을 창설, 1932년에는 영등포본당(지금의 도림동본당)을 분리 독립시켰다. 1947년 본당소속의 잠실(蠶室) · 반포(盤浦) · 양재(良才) · 방배(方背) · 서초(瑞草) 등 공소를 묶어 잠실(잠원동)본당으로 분리 독립시킨 것을 필두로 신용산(新龍山, 1948), 후암동(厚岩洞, 1949년), 홍제동(弘濟洞, 1949), 아현동(阿峴洞, 1957년), 서대문(西大門, 1958년), 청파동(靑坡洞, 1963) 등 여러 본당을 분립시켰다. 1973년 11월 12대 본당주임 김창석(金昌錫, 다테오) 신부가 부임, 85년이란 세월동안 많이 훼손된 성당건물 복원공사 기공식을 1974년 8월에 가졌다. 동시에 노후된 구 수녀원을 철거하고 아담한 수녀원(건평 29평)도 함께 신축, 1976년 4월 부활절을 기해 성당 복원식을 가졌다. 현재 본당주임은 13대 여형구(呂瑩九, 미카엘) 신부이며 주보는 성 요셉, 신자수는 4,103명(1983년 현재)이다.

[참고문헌] 최석우, 약현본당사, 약현천주교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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