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의 전통을 대표하는 신학자 및 저술가에 공통적인 교리적 경향으로 특히 주석학과 그리스도론에 집중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보완적인 학설들을 주장, 때로는 대립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신비적 경향인데 반해 역사적이다. 전기(3~4세기초)는 아리우스(Arius)의 스승인 루치아노(Lucianus, 240~312)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시작되어 270년부터 주요한 디다스칼리온(didascalion, 聖學)을 주도하였다.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아리우스를 옹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연히 구별, 후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후기(4세기말~5세기)의 대표적 인물은 타르수스의 디도루스(Didorus)로 이원적(二元的) 그리스도론을 폈는데 이것이 이 학파의 특색이 되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주석학에서 축어적(逐語的)인 해석을 주로 하였으며 에데사(Edessa) 학파에 영향을 주어 결과적으로 네스토리아니즘으로 발전하였다. 이 학파에 속하는 인물로는 사모사타의 바오로(Paul of Samosata)와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 및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us of Ancyra)를 거쳐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테오도레트(Theodoret), 그리고 반 단성론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알라코크 [원] Alacoque, Marguerite Marie
Alacoque, Marguerite Marie(1647∼1690). 성녀. 축일 10월 16일. 프랑스의 수녀. 부르고뉘주(州) 로트쿠르(Lauthecourt)에서 태어나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 수도원에서 별세하였다. 1671년 파레르모니알의 성모방문동정회에 입회, 이듬해 신앙고백을 하였다.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큰 계시를 받았다. 첫 번째에는 성심(聖心)이 이룩하는 무한한 사랑에 의탁하는 신앙심을 퍼뜨려야 한다는 것, 두 번째에는 성찬식과 회개의 기도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세 번째에는 성심이 기리는 특별한 축일을 가져야 한다는 것 등의 계시였다. 처음에 이 새로운 신앙심은 반대에 봉착했으나 복자 콜롬비에르(Claude de la Clolmbiere)의 지지를 얻고, 예수의 성심에 대한 숭경이 번지고, 교회로부터도 인정을 받았으며, 이 성심의 신앙심은 알라코크의 별세 후 전 세계에 퍼뜨려졌다. 186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1920년에는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알레니 [원] Aleni, Julio
Aleni, Julio(1582∼1649).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신부. 중국명은 애유략(艾儒略). 자(字)는 사급(思及). 중국인들에 의해 ‘서양의 공자’[西來孔子]로 추앙받았다. 북부 이탈리아 브레이시아에서 출생, 1600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609년 극동지역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610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1611년 광주(廣州)에 잠입하였으나 피체(被逮), 마카오로 추방되었다가 1613년 재잠입, 양주(楊洲), 섬서(陝西), 산서(山西), 복주(福州), 항주(杭州) 등 중국의 남부 내륙지방에서 전교하는 한편 여러 권의 천문역산서를 저술하였고 복건(福建), 산서(山西) 등지에 8개의 성당과 15개의 소성당을 세웠으며 천주(泉州)를 개교(開敎)시키기도 하였다. 1647년 청병(淸兵)의 복건성 침공으로 동료 디아스(Diaz, 陽瑪諾)와 함께 연평(延平)으로 피신하였다. 1649년 8월 3일 사망, 복주(福州) 북문(北門) 밖 십자산(十字山)에 안장되었다. 저서는 ≪天主降生言行紀略≫ 8권(北京 1642), ≪微撒祭義≫ 2권(福州 1629), ≪수罪正規≫ 4권, ≪萬物眞源≫(北京 1628), ≪三山論學記≫(杭州 1625), ≪利瑪竇行實≫(北京 1620), ≪五十言≫(福州 1645), ≪聖體要理≫(福州 1644), ≪西學凡≫ 1권(杭州 1623), ≪職方外紀≫ 6권(杭州 1623), ≪坤與圖說≫, ≪口鐸日抄≫ 8권(福州 1635), ≪幾何要法≫(1631), ≪四字經≫(北京 1642) 등이 있다.
알렉산데르 [라] Alexander [관련] 문예부흥기교황
Alexander, 3세(1105∼1181). 교황(재위 : 1159~1181). 본명은 Orlando Bandinelli.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 출신으로 교회법학자였다. 볼로냐(Bologna)대학 교수, 부제추기경(1150년), 사제추기경(1151년), 교황 비서국장(1153년), 교황사절 등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어 하드리아노(Hadrianus) 4세를 계승하였다. 재위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Friedrich, 赤髮帝)가 교황 선거에서 소수파였던 옥타비아노(Octavianus)를 후원하여 빅토리오(Victorius) 4세로 즉위시키자 17년간의 이교(離敎)시기를 맞게 되었으며 교황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이 이교는 1177년 베네치아 화약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망명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 베케트(Thomas Becket)를 보호해 준 사건으로 영국왕 헨리(Henry) 2세와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었으나 이것도 무사히 종결되었다.
그는 속세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교황으로서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레고리오(Gregorius) 8세로부터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에 이르는 시기의 교황권의 신장(伸張)과 강화라는 전체적 분위기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나, 교회 내에서의 교황권을 수호하는 데에서는 매우 단호하였다. 위의 사건들은 왕국 내에서의 교회의 적법한 권리에 대하여 교회법학자로서의 매우 조심스러운 관심과 왕권의 발달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그의 깊은 안목을 보여 준다.
재위 기간 중의 이러한 일련의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교회 발전에 뚜렷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1179년에는 제 3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주재하였으며 십자군 원정의 찬조금을 모으기 위해 <십자군대칙서>(Bulla Cruciata)를 발표하였다. 또한 학자로서는 <그라시아노 법령>(Decretum Gratiani)에 대한 주석과 신학적 저작인 ≪Sententiae Rolandi≫로 유명하다.
Alexander, 6세(1431?∼1503). 교황(재위 : 1492∼1503). ⇒ 문예부흥기교황
Alexander, 7세(1599∼1667). 교황(재위 : 1655∼1667). 원명은 Fabio Chigi. 오랜 명문인 이탈리아 시에나(Siena)의 키지(Chigi)가(家) 출신. 시에나대학에서 9년간 수학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1626년), 교황청의 사절로 일하면서 교황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쾰른에서 교황대사로 13년간 근무하고 뮌스터(Munster) 평화회담 때는 교황사절로 참가하였으며, 교황청 성성장관을 거쳐 인노첸시오(Innocentius) 10세 서거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열심한 교황이었던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王家)를 약화시키려는 부르봉왕가의 야심찬 루이 14세 때문에 정치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나 ‘5개항’을 단죄한 선왕의 입장을 계승하여 얀센의 이단을 단죄하고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개종을 포함하여 선교활동을 장려하였으며 이를 위해 포교성성(布敎聖省)에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예술의 수호자로서 베르니니(Bernini)의 대주랑(大柱廊)의 건설에 기여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사학자들을 위해 교황청 고문서실의 열람을 가능하게 하였다. 자비로운 교황이었던 그는 1656년 흑사병이 로마를 강타하자 빈자(貧者)들을 힘써 돕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1656년 중국 의례금지를 완화함으로써 예수회의 적응주의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