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신학 [한] 實踐神學 [라] theologia practica [영] practical theology [독] praktische Theol

교회가 행하는 교회 고유의 실천에 관한 이론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 신자의 지도를 비롯하여 세상구원의 수단인 진리와 성총을 각 개인에게 전달하는 등 실천부분에 관련된 이론을 취급하지만, 같은 실천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윤리학’ 등과는 구별이 된다. 실천신학이란 교회의 본질적인 이념에 따라 교회가 주체가 되어 자기실현을 도모하는 실천의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설교학, 사목학(司牧學), 선교학(宣敎學), 전례학(典禮學), 교회교육학, 교회법학, 사목심리학, 교회행정학 등 다양한 학문을 망라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교회에서 이미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가 ≪De fuga≫(365)를, 크리소스토모(Chrysostomos)가 ≪De Sacerdotio≫(敎職論, 6권, 386?)를 써서 사목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으로 삼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1세의 ≪Liber regulae pastoralis≫는 중세기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었다. ‘실천신학’이라는 용어가 사상 처음 사용된 것은, 1215년 라테란 공의회(제4회)에서 였는데, 하나의 학이 아니라 “고해를 위한 사제의 신중한 행위”를 의미하였다. 고해신부를 위한 지침서가 윤리신학으로 발전하여 교의신학에서 독립된 분과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 ‘실천신학’이라는 특정 과목은 없고 신학의 여러 분야를 구분할 때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분과 학문들이 실천신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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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변화 [한] 實體變化 [라] transsubstantiatio [영] transubstantiation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빵의 온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의 온전한 실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그 실존 양식이 변화되는 현상.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스콜라 학파의 유(有)의 개념을 성체론에 적용시킨 것으로 트리엔트 공의회(1551년)에서 교의로 선포된 것인데, 오늘날 이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역사상 성체의 변화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랑프랑(Lanfranc of Bec, 1005~1089)을 비롯한 11세기의 일부 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성과가 베렝가리오의 맹약(Jusjurandum Berengarius)에 반영되었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 의해 승인되었다(D. 430).

실체변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12세기 중엽 롤랑(Roland Bandinelii)이었으나 베드로(Petrus Cantor)의 견해가 유력하여 13세기 중엽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직 전통적 의미의 질료와 형상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에 베드로는 본질적인 특성은 변화되지 않고 우유(偶有)의 바탕으로 남는다고 하였다. 고전적 실체변화 교리에 도달한 또 하나의 사고노선은 알란(Alan of Lille)에서 비롯하여 윌리암(William of Auxerre)을 거쳐 알렉산데르(Alexander of Hales)에 의해 계승되었다. 알란은 실체를 본질전체로 이해하고 실체변화에서 실체는 변화하는데 우유(accidentia)의 존재는 기적에 의해 설명되거나 부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실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우유는 변화되지 않는 채 남는다고 하였다. 즉 실체변화는 적극적인 행위로서 이 행위에 의하여 하나의 현실적인 존재가 소멸됨이 없이 다른 현실적인 존재로 전체 실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위클립에 반대하여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주장되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되었다.

트리엔트의 정의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견해가 갈린다. 공의회는 상징주의나 영성주의에 반대하여 ‘실존의 사실’을 옹호했을 뿐 ‘변화의 방식’은 긍정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해석과(E. Shillebeeckx), 이 해석에 반대하면서 공의회는 루터의 실체공존론(Consubstantiatio) 즉 빵의 실체가 그대로 있고 빵과 더불어 빵 안에 그리스도의 몸도 실체적으로 현존한다는 교리에 반대하여 변화방법까지도 직접 긍정하였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논의의 실익은 공의회가 직접 긍정하지 않은 사항은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취하면서도, 스콜라학적 자연철학에 바탕을 둔 변화방법에 대한 설명은 그 바탕이 쇠퇴일로에 있는 오늘날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전자의 견해에 찬동하는 학자들도 많다.

변화방법을 실체변화로 설명하는 것이 현대 자연과학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크기나 색체 등 우유는 실체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했는데, 변화 후 빵의 실체는 없으면서 빵의 크기나 색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실체변화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무기체의 영역에서 취한 기본개념인데 스콜라철학이 이를 차용하여 구성한 것이므로 비인격적인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성체의 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 신학자들의 공헌이 크다. 그들의 입장은 다양하나 한결 같이 실존사실을 전제로 한다. 스미드(L. Smith)는 현상학적인 접근방법을 택하고 실레벡(E. Schillebeeckx)은 존재론과 노선을 같이 하나, 그들은 모두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의미변화(transsignificatio) 또는 목적변화(transfinalizatio)의 개념을 선택하는 데에 일치한다.

성체성사를 설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가르칠 뿐 현실적인 변화의 과정을 해석하는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실체변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즉 빵의 실체와 의미와 목적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의미는 그 재료를 손상함이 없이 변화될 수 있다. 한 채의 집은 재료들의 정돈으로 이루어져 그 본성과 목적을 지니나, 허물어져 그 재료들이 교량 건설에 이용되면 본성과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 의미가 달라진다. 집은 사는 곳이나 교량은 낮은 곳을 건너가는 수단이다. 그러나 재료의 손실은 없다. 이와 유사한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빵과 포도주를 들고 축성했을 때 의미가 변한다. 지상의 음식과 음료만을 의미하던 것이 이제는 예수의 현존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는 것의 목적도 변한다. 자연적 육체의 생명에 봉사하는 지상 음식의 목적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기르는 목적으로 변한다. 이는 빵 안에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Engelbert Gutwenger, Transubstantiation,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68 / 김영환, 성체 안의 그리스도 현존과 봉헌, 司牧, 65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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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한] 實學

조선 후기인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전통적 유학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한 범유학적(汎儒學的) 개혁사상. 조선조는 16세기 후반기부터 정치적인 대립과 분열이 심화되고, 유교의 학풍이란 사장(詞章) 중심이요, 당쟁(黨爭)을 조장하는 경향으로 흘러 사회체제를 개편하거나 혁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임란(壬亂)의 피해로 인하여 사회체제의 붕괴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리고 파탄에 직면한 사회 경제의 제반문제를 바로잡는 대안을 기존의 성리학에서는 제시해 주지 못했다. 이에 뜻있는 관료나 학자들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사장적(詞章的) 학풍이나 사변적(思辨的)인 성리학을 배격하고 급박한 현실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규범을 지양할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새로운 인식태도를 찾게 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서양의 학술에 관한 견문이 차츰 넓혀짐에 따라 더욱 열기를 더하게 됐다. 그래서 17-18세기에는 일부 관료 사이에도 그런 기풍이 작용, 김육(金堉)과 이원익(李元翼) 등은 대동법(大同法)이며 균역법(均役法)과 같이 민중을 중시하는 경제체제 개편에 힘썼다. 이처럼 기존체제의 강화 내지 보강을 기도하던 이들을 초기실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18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실학사상은 한결 고조되고 학자들은 자기의 나라, 조선 자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사회상태의 변화와 의식의 확대,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의 영향으로 자아에 대한 반성과 자아의식이 싹튼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조선조의 역사 · 지리 · 국어 등을 주로 한 여러 분야의 학문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이때 실학사상가들은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북돋아 주었으며, 이익(李瀷, 1681~1763)의 역사이론에 바탕을 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로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어 종래의 중국 중심의 사관(史觀)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전통성과 독자성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실학이란 주로 조선조 후기, 즉 영 · 정조(英 · 正祖) 시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을 일컫는다. 따라서 종래 성리학의 공리공론(空理空論)과 같은 폐단을 비판,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올바로 보면서 민중의 입장에서 광범한 학문적 분야를 통하여 민중을 대변하고, 또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경제이론과 기술론, 그리고 위정자의 자세 등을 제시한 새 학풍을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의 실학의 특질은 낡은 봉건적 전근대적 의식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근대의식 내지는 근대지향 의식이었다. 실학은 또 동아시아적 세계주의인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영향을 받게 된 우리나라의 문화풍토를 반성하며, 비민족적(非民族的) 정신상태를 타파하고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민족의 존립과 번영을 기도하는 민족지향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냈다.

현실을 중시하는 실학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하였다. 기존 사회질서를 개편하고 사회발전을 열망하는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접촉은 절실한 염원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 실학 사상가들에게 가톨릭 사상은 그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신념체계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가톨릭 사상에 대한 연구는 이들 실학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열망하는 이들 실학자들에 있어서도 가톨릭 사상이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실천적인 인생철학의 성리학적 배경에서 생활해온 이들에게 유일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내세의 구원 등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은 대단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가톨릭 사상과의 문화접촉은 지식계층 사이에서 비교적 광범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에의 귀의라는 문화 수용(受容)은 보다 제한된 범위에서 일어나게 된다.

당시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천주교에 대한 반응은 3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서학의 이질성을 위험스럽게 보는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이다. 그들은 서학의 해독이 맹수보다도 더 크다고 경고한 안정복과 척사 문헌인 ≪서학변(西學辯)≫을 저술한 신후담(愼後聃) 등이 이 유파에 속한다. 둘째는 서학이 갖고 있는 과학이나 기술의 분야는 수용하되 서학의 윤리나 종교적인 분야는 배격하는 경우였다. 그들은 서학이 갖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의 냉엄한 현실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의한 부국유민(富國裕民)의 방도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원하면서도, 서학의 종교성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유설(謬說)로 파악하려던 북학(北學)에 의해 대표된다. 셋째는 서학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이른바 서학도(西學徒)들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계(南人系)의 젊은 학자들로서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대표된다.

가톨릭의 본격적인 수용은 이들 남인계 실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학이 유교주의의 부족한 점을 극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가톨릭의 사상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모두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그들은 1770년대 후반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회를 가지면서 문헌과 자료가 부족함을 깨닫고, 1783년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 북경(北京)에 가게 된 이승훈(李承薰)에게 북경의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적과 성물(聖物)을 구해 오는 한편 꼭 영세를 받고 오도록 권고하였다. 그래서 1784년 이승훈이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의 기점(起點)이 된다.

[참고문헌] 劉元東, 韓國實學槪論, 正音文化社, 198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가톨릭社會科學硏究, 第1輯, 韓國社會科學硏究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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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 [한] 沈瓊

沈瓊(?~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경주진영에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의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옥사(獄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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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술 [한] 心靈術 [영] parapsychology

심령현상(paraphenomena)을 연구하는 과학으로 심령과학이라고도 한다. 심령현상이란 현대의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정신현상,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생각이 서로 전달되는 정신 감응(精神感應, telephathy),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각하는 천리안(千里眼, clairvoyance), 예언(豫言, premonition) 등과 같은 ‘감각의 지각’(ESP = extra sensory perception)과 정신적인 힘으로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염력(念力, PK = psychokinesis) 등을 총칭하여 지칭하는 용어다. 이러한 심령현상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주물숭배(呪物崇拜, fetishism), 마술, 점성술 등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심령술이 교회 내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운동 이후의 일이다. 즉 십자군운동으로 인하여 중동지방에서 발흥하던 마술, 신비철학, 점성술, 악마추방을 위한 형벌 등이 서구사회에 유입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심령술을 악마에게 공헌하는 행위라 규정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심령술을 배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은 민간에서 미신이나 관습의 형태로 계승되어 19세기에는 메스머리즘(mesmerism, 최면술) 등을 발생케 하였고, 19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심령술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1882년 영국에서 ‘심령연구협회’(The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가 창립되었고, 이어 미국과 기타 여러 나라에서도 유사한 단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의 심령술에 대한 연구는 주로 사례의 수집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서야 조직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심령술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화란교리서≫(Die Nienwe Katechismus)에서 간단히 제시된다. 이 책은 ‘감각외적 지각’을 좀 더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① 심령술이 악용되는 경우, ② 심령술을 장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 경우, ③ 인생의 궁극적인 신비를 심령술로 해결하려는 경우에 대해서는 잘못된 접근법임을 예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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