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교권과 세속권)의 관계에 대한 중세의 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우리는 복음서에 의해 교회가 영적 세계와 세속을 지배할 두 개의 칼을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 성속(聖俗) 양검(兩劍)은 교회의 권위 속에 있다. 영적인 칼은 교회가 사용하고, 세속적인 칼은 교회를 위해서 사용된다. 영적인 칼은 사제가 사용하고, 세속적인 칼은 왕과 병사에 의해 사용된다. 세속적인 칼은 영적인 칼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세속적인 권위자는 영적인 권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고 그의 회칙 <우남 상탐>(Unam Sanctam)에서 밝히고 있다. 이 교리는 왕과 사제가 다 같이 교회에 속해 있던 중세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양검론은 황제의 세속적인 권위가 점차 증대되어 가면서 황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황제측은 두 개의 칼은 하느님께서 칼을 가진 자에게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칼은 세속적인 영역에서는 교권에 독립되어 사용될 수 있다는 국가와 교회 병치론(竝置論)을 주장하였다. 한편 교황측은 루가복음 22:38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두 개의 칼을 우선 베드로에게 주셨기 때문에 세속적인 칼은 영적인 칼에 복종해야 하고, 명예와 품위 면에서도 영적인 권위가 세속적인 권위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양검론은 루가복음 22장 38절에 성서적 근거를 두고 있다. (⇒) 교회와 국가
양고 [한] 羊羔 [관련] 어린 양
고양(羔羊)과 함께 옛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던 말로 구약(舊約)시대의 파스카 축제 때 제물로 바쳐지던 어린 양(羊)을 뜻한다. 현재는 ‘어린 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 어린 양
양근 [한] 楊根
초기 한국 교회지도자 중의 하나인 권철신(權哲身) · 권일신(權日身) 형제의 고향으로 현지명은 경기도 양평(楊平).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윤유오(尹有五)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양기섭 [한] 梁基涉
양기섭(1905∼1982). 신부. 세례명 베드로. 평남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薪枝里)에서 숙천섭가지본당 초대 주임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의 복사를 지낸 양덕현(梁德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10월 26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졸업과 함께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평양 관후리본당 보좌신부를 거쳐 1934년 신리(新里)본당 주임신부, 1939년 숙천(肅川)본당 주임신부, 1942년 진남포(鎭南浦)본당의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교구로 이적한 뒤 초대 경향신문 사장으로 1년간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10년 동안 한국 교회를 위해 활약했고, 1957년 12월 귀국, 성신대학 의학부(가톨릭대학 의학부의 前身) 부장 겸 성모병원장에 취임하고 이어 1958년 서울교구 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60년 명동본당 주임신부, 1962년 일산본당 주임신부, 1965년 가평본당 주임신부, 1967년 신당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973년 일선사목에서 은퇴하고 원주교구의 교회유적지 배론[舟論]에 들어가 배론성역화사업을 주도, 10여년간 개발에 헌신하여 황무지였던 배론의 면모를 일신시켜 놓았다. 그러나 1982년 4월 3일 자신이 배론에 새운 건축물의 축성식을 11일 남기고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양덕동본당 [한] 陽德洞本堂
마산교구 주교좌본당. 주보는 예수성심. 소재지는 경남 마산시 양덕동 72의 7. 1975년 12월 8일 본당으로 창설되었다. 박기홍(朴基鴻, 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78년 11월 25일 완공하였고, 1979년 2월 7일 마산교구 주교좌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주보가 성가정에서 예수성심으로 바뀌었으며, 이어 5월 31일 2대 주임으로 김두호 신부(金斗湖, 알로이시오)가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예수성심 전교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있어 동회(同會)의 수녀들이 전교와 본당사목을 돕고 있으며, 1984년 현재의 교세는 신자수 3,410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