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서 [한] ∼書 [라] Liber Primus Esdrae [영] First Book of Ezra

1. 예비지식 : 이 책은 느헤미야서(느헤미야서 항목 참고)와 함께 바빌론 귀양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마소렛 본문의 에즈라서는 70인역의 에즈라 둘째 권에 해당하고 불가타역(譯)에는 제1 에즈라로 표기되어 있다. 불가타의 제2 에즈라는 마소렛 본문의 느헤미야서를 지칭한다. 불가타에 있는 제3 에즈라는 70인역에 제1 에즈라에 해당한다. 이 책은 많은 불가타역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지금 외경(apocrypha)으로 간주되는 이 책은 시나고가(Synagogue)에서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성경으로 취급되었다. 이 책의 특성과 기원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이에 대하여는 O. Eissfeldt의 구약입문 77을 참고할 것]. 내용으로 보아서는 히브리아 본문과 병행하는 부분이 많으나 다음에 지칭하는 구절은 이 책이 더 수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1:1-20 = 2역대 35:1-19, 1:23-55 = 2역대 35:20-36, 2:1-3a = 2역대 36:22 이하 = 에즈라 1:1-3a, 9:37-55 = 느헤 7:72-8:13a 등이다.

묵시록으로 알려져 있는 불가타의 제4 에즈라는 70인역에서 ‘예언자 에즈라’ 또는 ‘에즈라의 묵시록’으로 불린다. 많은 불가타역에는 그리스도적 요소가 들어 있는 제5 에즈라(=제4 에즈라 1장 이하)와 제6 에즈라(=제4 에즈라 15장 이하)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제4 에즈라(3-14장)는 7가지 현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현시 속에서 에즈라는 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운명, 세상 종말의 표지, 하느님의 오심 등에 대하여 알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미래의 이스라엘, 제4 세계 그리고 메시아의 심벌로서 여인, 독수리, 인간의 아들의 형태를 본다. 이 이야기는 에즈라가 예루살렘 멸망시에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구성하여 성경으로 삼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기원후 1세기경 히브리아어 아니면 아라메아어로 쓰였다.

에즈라(히브 ‘ezra’는 하느님의 도움이란 뜻을 지님)는 바빌론으로 귀양간 유태인들의 사제로서 페르시아 정부의 유태인 담당 기구 안에서 조언자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페르시아왕 아르닥사싸 9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태인의 공동체를 다시 이룩할 임명을 받았다. 약 1,500명의 유태인과 그 외 많은 성전 봉사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7장 이하) 법을 선포하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킬 것을 명하며 타민족과의 혼인을 금하였다(에즈 9장 이하). 대사제 요하난의 살인 때문에 생긴 동요를 진정시켰다. 그 뒤 페르시아로 돌아갔으리라고 본다. 학자들 간에 아직도 토론되고 있는 문제는 에즈라가 선포한 법에 관한 것이다. 그 법이 제관기의 특별판(版)이었는지 혹은 모세오경이었는지, 아니면 신명기의 영향을 받은 법이었는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에즈라 9:11 이하와 느헤미야 8:14 이하에 인용된 법이 모세오경에 없는 것을 보아서는 에즈라가 선포한 법이 모세오경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인 듯하나 법을 낭독할 때 새법을 선포하기보다는 있는 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법은 모세오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 내용 : 에즈라서는 1-6장(=귀향의 허락과 성전 재건)과 7-10장(=에즈라의 활동)으로 대별할 수 있다. 1-6장의 재용은 다음과 같이 약술할 수 있다. 기원전 538년 시루스왕이 유태인들의 귀향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여서(1장) 세스바자로, 즈루빠벨 여수아의 인도하에 신자와 성직자들이(2장의 명단 참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곧 제대를 세우고 성전의 기초를 놓고(3장)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사마리아인들이 방해를 한다(4:1-5). 이들은 크세록세스와 아르닥사싸 왕들에게 호소하여(4:6-16) 성전 건립을 중지시키는 데에 성공한다(4:17-24). 그러나 유다 공동체는 성전 건립을 다시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고(5장) 다리우스왕은 시루스왕의 허락 명령을 근거하여 계속 짓기를 명한다(6장). 515년에 완공하고(6:13-18) 빠스카 축제를 지낸다(6:19-22).

에즈라 7-10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즈라가 아르닥사싸의 전권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오며 같이 귀향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다97-8장). 성전 광장에서 모이는 기회가 있을 때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에즈라는 보속의 기도를 드리고는 이혼을 결정한다. 약 100쌍이 이혼한다(9-10장).

3. 저자, 자료, 구성 : 에즈라서의 저자는 느헤미야와 역대기를 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대기 편찬자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이 이 세 권을 썼다는 것은 이 세 권에 쓰인 문체, 단어, 정신, 기본사상 등이 같고 에즈라가 역대기 끝줄을 이어 받아서 시작한다는 사실로 알아볼 수 있다. 이 저자는 예절과 성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보아 아마도 예루살렘의 경신례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제라기보다 레위족에 속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내용 중 가장 후대에 일어났던 것이 기원전 400년경이니까 저술은 당연히 훨씬 후(300년경)라고 볼 수 있다.

이 역대기 편찬자는 에즈라와 느헤미야를 쓸 때 여러 사료(史料)를 이용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도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음을 상기시켜 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료가 이용됐다고 본다. 첫째 느헤미야의 회고록으로 켈러만(Kellermann)에 의하면(느헤 1:1-7:5b, 12:27a · 31f · 37-40, 13:4-31)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둘째로 에즈 4:6-6:18에 나오는 아라메아어로 된 본문을 들 수 있다. 4:6-23에 나오는 크세록세스와 아르닥사싸와 관계된 것은 역대기 편찬자가 썼기 때문에 연대에 있어 혼돈을 일으키나 이 문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 없다(Ed. Meyer).

셋째 에즈 7:12-26이 느헤미야 회고록에서 같이 1인칭 단수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연대기 편찬자가 쓴 사료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 사료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루돌프(W. Rudolph)는 더 넓게 생각하여 에즈 7:12-8:36, 느헤 7:72b · 8, 에즈 9장 이하, 느헤 9장 이하까지 사료라고 본다. 그러나 문체가 역대기 편찬자의 것을 닮았고 1인칭 단수의 문체도 느헤미야 회고록을 모방하여 썼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사료로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어떤 오래된 재료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있다.

넷째로 들 수 있는 사료는 여러 명단이다. 에즈 1:8-11a, 2:1-67, 8:14, 느헤 3:1-32, 11:25-36 등이다.

이런 자료를 써서 역대기 편찬자가 지금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라고 불리는 한 권의 책을 쓸 때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에 의거한 순서는 크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① 에즈 1-6 = 성전 건립의 허락 – 그 축성, ② 에즈 7-8, 느헤 8, 에즈 9-10 = 법의 선포 – 보속의 전례와 법 준수의 약속, ③ 느헤 1-7, 11∼13 = 성벽건축의 허락 – 그 낙성. 자세히 살피면 이 세 부분의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의 허락 또는 결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끝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전자는 유태인의 공동체의 운명에 대하여 결정권을 갖고 있는 페르시아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유다민족의 존재의 의의를 규정하는 하느님께 대한 성실성과 그에 따른 유태인의 자주성을 견지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 사마리아인과 적이 되는 이웃 민족과 지역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종교는 이념적인 의미에서(예를 들면 이웃 민족과의 결혼을 금하는) 자주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에즈라-느헤미야서의 중요 핵심은 둘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법이, 귀향한 유태인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곤경에 처할 때,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사회개혁의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법과 제사를 통하여 내적 외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법과 제도 중심의 종교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특성 : 에즈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지향이 특성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복구, 유다 공동체의 회복 등은 하느님이 당신 약속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하느님의 법이 생활의 중심이라고 설파하므로, 에즈라-느헤미야서가 역대기와 처음부터 한 책으로 쓰여졌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정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역대기와 한 책을 이루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이 옳다면 인과응보의 해석 원칙도 이 책의 의도를 규명하는데 적용할 수 있으나 에즈라-느헤미야서를 독립된 책이라고 본다면 위와 같은 시도는 주의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5. 문제점 : 우선하는 질문은 에즈라-느헤미야서와 역대기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기 역사는 역대기, 에즈라서, 느헤미야서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와 왔으나 노트(M. Noth), 폴만(F. Pohlmann) 등 몇몇 학자는 이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고 윌리암슨(H.G.M. Williamson) 등은 에즈라-느헤미야서는 역대기와 함께 쓰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대하여 군네벡(A.H.J. Gunneweg)이 이견을 내세움으로써 이 문제는 종결된 것으로 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에즈라가 활동한 연대(年代)가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재래의견에 따르면(에즈라 7:7 이하) 에즈라는 아르닥사싸 1세 집정 7년에, 기원전 458년, 느헤미야는(느헤 2) 그의 집정 20년에(기원전 445년) 예루살렘에 돌아왔다(Roland de Vaux). 후나커(A. Van Hoonacker)는 에즈라가 느헤미야보다 늦게 활동하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에즈 7:8에 나오는 왕은 아르닥사싸 2세를 지칭하는 것이고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귀향한 해는 398년이 된다. 해결방법으로 파블로프스키(V. Pavlovsky)는 에즈 7:7에 나오는 연대가 틀린다고 하고 슈나이더(H. Schneider)는 기원전 458, 428, 398년이 다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의견도 결정적인 답을 주기에는 미흡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 에즈라의 활동이 느헤미아의 등장보다 늦다고 볼 때 본문의 이해가 쉽다고 생각되나 이 연대 문제는, 역대기적 역사서를 쓴 저자가 여러 사료를 사용하여 자기 책을 쓸 때 연대순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거나 또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沈勇燮)

[참고문헌] W. Rudolph, Esra und Nehemia, Tubigen 1949 / J.M. Meyersm, Esra and Nehemia, N.Y. 1981 / H. Cazelles, La Mission d’Esdras, vth, 1954 / A.H.J. Gunneweg, Zur Interpretation der Bucher Esra-Nehemia, 1981 / A. van Hoonacker, La Succession Chronologique Nehemie-Esdras, RB32, 1923; 33, 1924 / S. Japhet, The supposed common Authorship of Chronicles and Ezra-Nehemia Investigeted anew, 1968 / U. Kellermann, Nehemia, Quellen uberlieferung und Geschichte, Berlin 1967 / K. Koch, Ezra and the Origin of Judaism, 1974 / A. Lefevre, Nehemie et Esdras, DBS V1.Sp. 393-424, ed. Meyer, Die Entstehung des Judentums 1896(1965) / S. Mowinckel, “Ich” und “Er” in der Ezrageschichte, in: Verbannumg und Heimkehr, W. Rudolph 기념논문집, 1961; Studien zu dem Buche Ezra Nehemia, I, II권, 1964; III권, 1965 / M. Noth, Uberlieferungsgeschichtliche Studien, Tubingen 1967 / F. Pohlmann, Studien zum dritten Esra, Gottingen 1970 / V. Pavlovsky, Die Chronologie der Tatigkeit dese sdras, 1957 / H. Schneider, Die Bucher Esra und Nehemia, Bonn 1959 / M.A. Throntveit, Linguistic Analysis and the Question of Authorship in chronicles Ezra and Nehemia, 1982 / R. de Vaux. Israel. Exdras-Nehemie, DBSIV / H.G.M. Williamson, Israel in the Books of Chronicle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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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르트 [원] Eckardt, Andreas

Eckardt, Andreas(1884∼?). 독일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 선교사. 한국명은 옥낙안(玉樂安). 1909년 성 베네딕토회가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한국에 입국, 이 회에서 설립한 숭공(崇工)학교와 숭신(崇信)사범학교에서 미술을 강의했고, 1929년 이 회가 원산교구를 관할하게 되자 원산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928년 독일로 귀국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미술을 개설한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를 남겼다. 독일에서의 한국학의 개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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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 [원] Ecuador

남아메리카의 독립 공화국. 북으로 콜롬비아, 동과 남으로 페루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에콰도르’란 나라 이름은 이 나라가 적도[equator]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겼다. 면적 28만 3,561㎢에 인구 약 895만명(1982년 추계)이다. 16세기 중반과 후반에 에콰도르의 선교사업에 종사한 단체는 프란치스코회, 메르세다리안회, 도미니코회 등이었다. 선교사들이 주로 남미 여러 나라에서 보는 것처럼 스페인 정복자들을 따라 들어와 선교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학교 등을 세워 원주민의 계몽사업에 종사한 점은 공통적인 현상이다.

1545년에 교황 바오로 3세는 에콰도르에 퀴토(Quito) 교구를 세우고, 프란치스코 피자로의 군종신부였던 아리아스(Garcia Dliaz Arias)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 1900년 이래 퀴토 주교좌는 비상한 주교들이 다스리는 바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수아레스(Federico Gonzalez Suarez, 1906∼1917)로써 에콰도르에서 가장 위대한 성직자의 서열에 낀다. 그는 특히 교회사 연구에 뛰어난 사람으로 그의 ≪에콰도르의 역사≫는 기념비적 대작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1952년에 추기경이 된 토레(Carlos Maria de la Tore)는 가톨릭 국민학교, 가톨릭 사범학교, 퀴토 가톨릭대학 등을 설립하여 가톨릭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고, 많은 외국 선교사, 수녀들을 에콰도르에 불러들여 치료소 · 학교 · 병원 등을 경영하게 한 것도 그의 큰 공이라 하겠다. 1982년 현재 가톨릭 신자수는 823만 8,000명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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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원] Eckhart, Meister

Eckhart Meister(1260?∼1327). 독일의 신비사상가. 도미니코회 회원. 튀링겐지방의 고타(Gotha)에서 태어나, 에르푸르트, 쾰른에서 공부한 후 파리에 유학, 1302년 수사(修士)가 되었다. 귀국 후 수도원장으로 취임, 그 후에는 주로 라인강 상류지방에서 학식높은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만년(晩年)은 불우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으며(1326년), 교황에게 억울함을 상소했으나 미해결인 채로 죽었다. 그의 28종에 이르는 저서는 사후에 교황 요한 22세(재위 : 1316~1334)에 의해 이단으로 선고됨으로써 금서(禁書)로 낙인이 찍혔다(1329년). 그는 저명한 학자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신비사상가였으며, 이 신비사상가로서의 본질이 교회의 금기(禁忌)에 저촉되었던 것이다. 그의 교설은 토마스 아퀴나스류(流)의 사변적 색채로 덮여 있었는데, 그 본질은, 모든 것은 “영혼 속의 하느님의 말씀이 태어난다”라는 신비적인 마음의 체험일 따름이다. 그는 신학이나 교회의 권력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주장하였다(내가 없으면 하느님도 없다). 이것은 독일 신비사상의 원천이 되어, 신도들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는 새로운 독일어의 창조자이다. 독일어가 시(詩) 분야에서만 쓰이고 있던 13∼14세기에, 그는 독일어로 자신의 철학을 서술하였다. 그것은 독일 정신사의 새로운 혁명을 의미한다. 그는 독일어의 자유로운 비유에 의해서 새로운 정념과 정신의 세계를 개척한 것이다. 독일어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연’, ‘어둠’, ‘사막’, ‘영혼의 불꽃’ 등과 같은 대담한 표현이야말로 그의 신비사상의 핵심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영혼의 밑바닥에 숨겨진 ‘불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요, 하느님과 함께 창조한다. 왜냐하면 이 불꽃은 하느님 ‘심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둠’’, ‘사막’, ‘무’는 계시의 하느님의 배후에 숨은 개념으로서는 파악할 수도 없는 신성(神性)을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영혼은 그리스도와의 합일(合一)을 즐길 뿐 아니라 신성과도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로고스이다(그노시스). 이 ‘사막’이요 ‘무’인 신성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신비사상은 그리스도교적이라기보다는 신(新)플라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 ≪Die Gesamtausgabe der deutschen und lateinischen Werke, hrg. im Auftrag der deutschen Forschungsgemeinschaft≫(1936)가 있다.

[참고문헌] J. Bernhart, Berhardinische und Eckhartische Mystik, 1912 / Ph. Strauch, Eckhart-Probleme, 1912 / F. Weinhandl, Eckhart im Quellpunkt seiner Lehre, 1926 / F. Meerpohl, Eckharts Lehre vom Seelenfunklein, 1926 / R. Backofen, Meister Eckhart,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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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Ephesinum [영] Council of Ephesus

Council of Ephesus(431년). 네스토리우스파와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에 의해 소집된 제3차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인솔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성 첼레스티노(St. Celestinus) 1세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에페소의 주교 멤논(Memnon)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주된 적수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us)는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 채 회의를 개막하여 버렸다. 거기서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교구 콘스탄티노플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자신은 파문당하였고 그의 교리는 단죄되었다. 또한 니체아 신경이 재확인되었다. 도착하여 그 사실을 들은 시리아의 주교들은 치릴로의 처사에 항의하는 테오도레트(Theodoret) 및 다수와 규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회의를 열고 거기서 치릴로와 멤논을 파문하였다. 에페소 공의회는 8개의 교회법을 제정하였는데, 첫 7개는 교리적 의문점들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을 다루었고, 나머지 하나는 치프로스(Cyprus)의 행정적 권리를 다루었다. 433년 요한과 치릴로는 마침내 화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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