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평신도단체. 1833년 프레드릭 오자남(Frederic Ozanam) 신부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신부의 정신을 이어 받아 빈민구제사업을 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이 회를 창설했고, 1961년 1월 5일 청주교구의 파디(Pardy) 주교의 주선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뉴질랜드 대표 게이노(Geynor)의 도움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청주교구 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의 활동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를 통괄할 수 있는 전국이사회 창립의 요청을 받고 1973년 4월부터 5차에 걸친 준비회합을 거쳐 1975년 2월 21일 한국 전국이사회가 창립되었다. 초대 이사장으로는 한병은, 초대 지도신부로는 호세 산도발(Jose Sandoval, 蘇) 신부가 임명되었다. 현재 한국 전국이사회 산하에 서울중앙이사회, 춘천중앙이사회, 청주중앙이사회, 광주중앙이사회, 마산중앙이사회, 부산중앙이사회, 인천지구이사회, 전북지구이사회 및 대전 대동협의회, 제주 서문협의회, 원주 풍수원협의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본회의 회원들이 어떤 도움을 베푸는 것은 그 회원들이 은인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라] Vincentius a Paulo
Vincentius a Paulo(1580?-1660). 성인. 사제. 라자리스트회와 자선수녀회의 창설자. 축일은 9월 27일. 남서 프랑스 랑퀴엔(Ranquine) 출신의 농부 아들. 툴루즈(Toulouse)에서 신학을 배우고 1600년 서품되었다. 1605년 이슬람의 해적들에게 사로잡혀 노예생활을 하였으나 1607년 아비뇽(Avignon)으로 탈출, 1608년 파리에서 드 베륄(De Berulle) 신부의 영향으로 일생을 자선활동에 바칠 것을 결심, 노예선 선장 곤디(Gondi) 백작의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죄수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1613∼1625년). 그 당시 남녀 자선단체들을 창설. 1625년 보통 라자리스트회라고 불리는, 특히 시골 선교와 성직자들의 훈련을 위한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8년 후 온전히 병자와 빈자의 간호를 담당하는 첫 여자수도회인 자선수녀회를 성 루이즈 드 마빌락(St. Louise de Mavillac)과 함께 창설함으로써 프란치스코 드 살레시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던 계획을 완수하였다. 프롱드전쟁 때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장기적 안목의 계획을 세우고, 또 얀센주의를 단죄하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737년 시성. 1833년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자유사상가들로부터 가톨릭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오자남(Ozanam) 등에 의해 창설되었다.
빈첸시오 [라] Vincentius
① 사라고사의 빈첸시오(V. Saragossae, ?∼340?). 성인. 부제. 축일은 1월 22일. 그는 사라고사의 발레루스(Valerus) 주교의 부제였는데 304년에 순교했을 것으로 본다. 그에 대한 공경은 특히 중세기에 발전하였다. 그의 이름이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에 삽입되었고, 특히 포르투갈, 나무꾼, 포도재배원, 선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② 레랭의 빈첸시오(V. Lerinensis, ?∼450?). 성인. 라틴교부.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 신학자. 지중해의 레랭(Lerins)섬 수도원에서 살고 있던 박학(博學)한 수사. 그는 많은 점에서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tinus)에게 공명(共鳴)하면서도 그의 은총과 예정의 교리를 가톨릭의 전승(傳承)으로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가공적인 교리에서 인간의 의무에 대한 노력과 책임감을 희박하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그리스도교 진리의 최종적 근거이며, 교회는 다만 그 올바른 해석자라고 하였다. 한편 <신앙의 진보>란 장(章)에서,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성서의 진리는 보다 더 잘 해명되는 것이라면서 교리의 발전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진리야말로 본래의 가톨릭적인 것이므로 교회는 그 진리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통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정식화(定式化)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빅토리아 [원] Victoria, Tomas Luis de
Victoria, Tomas Luis de(1540?~1611). 스페인 태생의 로마파 작곡가. 팔레스트리나(G.P. da Palestrina)의 친구이자 추종자. 스페인 카스틸랴 지방의 아빌라에서 태어나 음악 기초교육을 스페인에서 받고, 1565년 로마에 가서 이듬해 그 곳 Collegium Germanicum의 성가대원이 되고, 1575년에는 그 성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로마의 성 아폴리나레 성당의 성가대장으로 있다가 1589년경 마드리드로 돌아와 1602년까지 궁전성당 성가대 악장으로 있었다. 그의 작품은 19세기초에 독일 라이프치히의 브레이트코프(Breitkop) 출판사에서 제 8권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음악은 순수하고 완벽한 교회양식으로 되어있고, 스페인 음악 특유의 짙은 색채를 구사하고 있다. 그 자신이 가톨릭 교회 신부였기 때문인지 그의 작곡에서는 감각적 흥분이란 없고 오로지 가톨릭 교회만이 지니는 깊은 신비감만을 느끼게 된다.
비호권 [한] 庇護權 [라] jus asyli [영] right of asylum
보호를 요청해 온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권리. 어떤 신성한 지역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 도망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비호권의 세속적인 형태는 특권행사 허가지구에서 행해지는 특권, 노예가 ‘자유의 도시’에 도망쳤을 때 가지는 자유, 대사관이 가지는 치외법권 등이고, 종교적인 형태란 교회에 도망쳐 온 사람에게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는 특권을 말한다.
비호권은 역사의 몇 단계를 거쳐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데, 대체로 국가에 의한 신법(神法)질서가 약해졌거나 파괴되었을 때 특히 강조된다. 즉 국가에 의한 사법질서가 공정하지 못하여 일반인으로부터 불신당하거나, 국가에 의한 법질서가 파괴되었을 경우에 사적 보복(私的報復)이 일반화되어 사회는 파괴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 피의 보복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불법재판에 의한 사적 형벌이 횡행한다. 이 때 위험에 빠진 사람을 은신시켜 그러한 사적 보복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치외법권적인 지역을 설정, 이들을 보호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된 이후부터 교회는 비호권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도망자를 위해 사제가 중재에 나설 때까지 체포를 연기하는 정도의 비호권만이 교회에 주어졌다. 중세에 와서 비호권은 강화되었고, 자세한 규정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비호권은 중재행위와는 별도로 신성한 장소에서 폭력을 동원한 체포를 막을 수 있는 권한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비호권의 보호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주로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하에서 구조적 폭력을 당해야 했던 농민, 제조업자, 상인들이었다.
시민사회가 확대된 중세 이후 비호권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동시에 국가권력이 교회의 비호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일어났다. 교황 그레고리오 14세 이후(1591년) 비호권은 교회법전에서 원칙으로만 남아 있었다. 구교회법(1917년 공포)에 따르면 비호권이 인정되는 지역은 성당, 묘지, 수도원, 병원, 주교관, 사제관 등이다. 근대국가는 비호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므로 교회는 성당이나 축성된 묘지에 한해서, 공공의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안에서, 비호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곳에 도피해 온 사람은 긴급한 경우가 아니고는 교구직권자, 수도회 장상, 최소한 본당 주임사제의 동의없이는 폭력으로 체포해 갈 수 없다”고 구교회법은 규정하고 있으며(제1179조), 비호권의 침범을 독성(瀆聖)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325조). 왜냐하면 축성되어 성스러워진 장소는 세속권의 간섭이 자유로운 곳(제1160조)이며 이것은 신법에 기초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양심법에 대한 교회의 비호권이 여러 정권들과 마찰을 빚었다. 비호권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은 1983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피의자를 숨겨준 원주교구(原州敎區) 최기식(崔基植) 신부의 구속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이 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의한 사회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계층이 있고, 불공정한 재판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비호권은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권리이다.
[참고문헌] J.C. Cox, The Sanctuary and Sanctuary Seekers of Medieval England, London 1911 / P. Timbal Duclaux de Martin, Le Droit d’Asile, Paris 19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