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를 추진하는 곳으로 1964년 창설. 이슬람을 위한 특별부서가 따로 있다. (⇒) 교황청사무국
교황청 행정기구 중의 하나. 사회 속에서 더욱 생동하는 교회로 부각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설되었다. 이 사무국은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비그리스도교도 사무국 및 무종교자 사무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교황청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를 추진하는 곳으로 1964년 창설. 이슬람을 위한 특별부서가 따로 있다. (⇒) 교황청사무국
교황청 행정기구 중의 하나. 사회 속에서 더욱 생동하는 교회로 부각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설되었다. 이 사무국은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비그리스도교도 사무국 및 무종교자 사무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 교황청
Vigouroux, Fulcran Gregoire(1837-1915). 성서 주석학자. 프랑스 낭트(Nante)에서 출생하여 파리에서 별세. 사제가 되고(1861년) 나서 오통(Autun, 1862∼1864년)과 이시(Issy, 1864∼1868년)에서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친 뒤 생쉴피스회에 입회하여 성서학 교수생활이 시작되었다. 파리 Institut Catholique에서 성서학 교수가 되었고(1890년) 교황청 성서위원회(Pontifical Biblical Commission)의 첫 위원장을 역임했으며(1902년) 만년에 반신불수로 고생하였다(1913년).
그는 가톨릭 성서부흥을 실현시킨 중심 인물 중의 하나이며, 대표작 ≪Dictionnaire de la Bible≫(1895∼1912)을 편집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La Bible et les Decouvertes modernes en Egypte et en Assyrie≫(1896, 6판), ≪La Nouveau Testament et les Decouvertes archeologiques modernes≫(1896, 2판), ≪Les Lives Saints et la critique rationaliste≫(1901∼1902, 5판), ≪Manuel biblique ou cours d’Ecriture Sainte a l’usage des seminaires : Ancien Testament≫(1879∼1880) 등이 있다. 이 저서들은 대부분 호교론적이며 성서의 역사성을 변호한다. 보수적인 기질이 엿보이면서도 성서 연구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학의 한 분야이자 종교학의 방법론. 종교본질론, 혹은 종교사라고도 한다. 종교학(Religions-wissenschaft)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뮐러(Max F. Muller)는 종교학이란 세계의 여러 종교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그 연구방법으로는 다음의 3가지, ① 종교의 여러 사실(fact)을 수집하고, ② 수집된 여러 종교의 사실들을 비교하며, ③ 이를 통하여 종교의 기원, 목적, 본질을 해명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속에 공통적인 사실들과 상이점을 추출하여 그것을 비교, 검토하고, 또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과정을 밝힘으로써 종교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연구의 방법은 그 뒤 종교학의 기본적인 방법의 하나로 정착되었고 틸레(P. Tiele), 소사예(L. de la Saussaye), 클라크(J. Clark), 엘린우드(F. Ellinwood)를 거쳐 미국에서 비교종교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history of Religions)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종교로부터 자연적으로 진화한 종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교종교론의 연구를 장려한다.
Blondel, Maurice(1864-1949).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디종에서 태어나 악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별세하였다. 1863년 에콜 노르말(Ecole Normale)에서 학업을 마치고, 릴(Lille)대학 교수를 거쳐 1896년부터 여생을 악상프로방스에서 보냈다. 1927년까지 악상프로방스대학 철학교수로 있다가 실명(失明)하자 은퇴생활을 하였다. 은퇴기간인 1929년부터 1949년 사이에 그는 주저(主著) 10권을 집필, 신체적 악조건 하에서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처음에 그는 모든 사유활동(思惟活動)에 혼입(混入)되어 있는 행위의 의미를, 주지주의를 초월한 실용주의적 논리에 의해 포착하려 함으로써 근대주의자로 오해받았지만, 철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행위에서는 의지와 능력의 이율배반으로 좌절되는 인간의 본질이 밝혀진다면서, 거기에 초자연적인 것에 의한 작용을 연관시켜, 철학과 신학, 사유와 신앙 사이의 상관성을 역설하였다. 주저로 ≪L’Action≫(1893), ≪Le Probleme de la philosophie catholique≫(1932), ≪La pensee≫(2권, 1934), ≪La philosophie et l’esprit chretien≫(2권, 1944∼1946) 등이다.
Blane, Jean Marie Gustave(1844-1890). 파리 외방전교회원. 제7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명 백규삼(白圭三). 1866년 12월 22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이듬해 2월 15일, 파리를 떠나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인(丙寅)박해로 두 조교를 함께 잃고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Ridel)신부를 만나, 함께 조선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 10년 동안 리델 주교를 도와 교리책의 번역과 ≪한불자전≫(韓佛字典)의 편찬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1876년 리델 주교, 드게트(Deguette)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나, 5월 8일 리델 주교를 다시 청국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 조선땅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목자를 다시 갖게 된 조선 땅을 숨어 다니면서 그는 전교에 힘쓰는 한편, 다시 주교를 맞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그 결과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를 다시 맞게 되었으나 곧 주교가 잡히는 몸이 되어 추방되자 주교없는 한국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1882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83년 7월 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더욱 전교에 힘써 1887년말에는 14명의 성직자 14명의 신학생과 신자수 1만 5000명을 헤아릴 수 있게 되어, 박해로 거의 다 쓰러져가던 조선 교회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1887년 9월 21일에는 조선 교회의 지도서를 공포하여 통일된 법전을 갖고 규칙에 따라 교회 행사를 집행할 수 있게 했고, 1888년 6월 8일에 조선교구를 예수성심께 봉헌하는 장엄한 미사를 올려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최후의 승리를 감사드렸다. 한편 방인 성직자 양성에 힘써 1885년에 강원도 부흥골에 신학교를 설치하여 페낭유학생을 포함한 신학생을 수용하였고, 2년 뒤에는 용산으로 옮기었는데 그때의 신학생수는 21명이었다. 고아와 노인들을 위한 사회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1885년에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40명의 노인과 100명의 고아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 사업을 위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여 4명의 수녀를 파견받아 그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대지를 사들여 1887년부터는 종현(鐘峴)의 산등을 깎아 1890년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2월 2일 이를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고 곧 주교관을 세우려 했으나 갑자기 중병을 얻어 2월 21일 46세로 선종하였다.
[참고문헌] Compte Rendu (1890), Paris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