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1 [라] Bonifatius

Bonifatius, 8세(1234?-1303). 교황(재위 : 1294-1303). 이탈리아 귀족 가에타니가(家) 출신. 볼로냐(Bologna)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을 공부한 후 교황청에서 근무하였고, 파리 공의회(1290년)에서 교황사절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추기경(1291년)을 거쳐 1294년 무능한 성 첼레스티노(Celestinus) 5세를 폐위시키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초기부터 많은 반대파를 갖게되었는데 그 중에는 연로한 전 교황의 강제퇴위 문제로 반목하던 ‘급진적 엄격주의파’와 그의 인척등용을 비난하는 콜로나가(家) 등이 있다. 재위 중 발생한 가장 큰 사건으로 프랑스 필립(Philip) 4세와의 교황권과 세속 왕권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교황청이 100년 전쟁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프랑스교회에 대한 과다한 과세를 징수하고, 교황의 동의없이 왕은 성직자에게 어떠한 세금도 부과할 수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 필립 5세에 대해 교황은 파문으로 위협하였고, 필립 5세의 편에 콜로나가와 영성 프란치스코회가 합세, 교황 승직의 불법성과 이단 등을 이유로 교황을 단죄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교회가 사상 최초로 대사(大赦)의 해로 선포한 130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교황은 영적 권력과 속세의 권력에 대한 중세의 유명한 대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황이 세속 제왕을 임명하고 재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아냐니(Anagni)에서 콜로나가의 무리에게 유괴되어 목숨을 위협받고 난 뒤 곧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에 의해 절정에 다다랐던 교황권이 새로이 상승하는 국가주의 및 왕권과 적절한 세력균형을 이루지 못해 일어났다. 또한 교황 측의 실패에는 교황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가문의 세력 팽창에 대한 집착 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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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 [라] Bonaventura

Bonaventura(1221-1274). 성인. 축일은 7월 14일. 이탈리아의 스콜라 신학자. 교회학자. 주교. 추기경. 이탈리아 비테르보 지방에서 태어나 20세 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파리 대학을 마치오 동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였다(1248-1255년). 이 때 동료교수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친교를 맺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회 총장으로(1257-1273년), 동회의 조직을 강화하는 등 혁신에 진력, 동회 제2의 건설자로 일컬어졌다. 첼라노(Celano)의 토마스(Thomas)의 저서를 바탕삼고 그것을 보족(補足)해서 공간(公刊)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Legendamajor S. Francisci)는 그 후 동회의 공인된 전기(傳記)가 되었다.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의 교황선거 때(1271년) 그를 강력히 지지, 그 공으로 알바노의 주교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1273년). 제 2차 리용 공의회(1274년)에 신학 고문으로 초빙되어, 회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성 토마스 이후 최대의 스콜라 학자로서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학파를 지도하였다. 당시는 스콜라학의 전환기여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부흥과 아울러 새로운 신학사상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점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대립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창조는 우리들의 이성(理性)의 빛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추상설을 주장하였고,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이 신앙깊은 그리스도교도에게 분배하는 신비적 조명(照明)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신비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베르나르두스(Bernardus, 1090?-1153)를 중시, 거기서 중요한 요소를 흡수했고. 또한 이른바 ≪가짜 디오니시오 문서≫를 애호하여 신비적 사색에 몰입하였다. 그의 소설(所說)에서 다소 모순과 불철저함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롬바르도(Petrus Lombardus)의 ≪명제집≫에 대한 주석(註釋)으로 명저(名著)를 남겼다. 그밖에도 ≪전집≫이 있고, 또한 ≪Doctoris Seraphici S. B. Opera omnia, Ad Claras Aquas≫(10권, 1882-1902), ≪Commentarii in IV libros Senteniarum Petri Lombardi≫, ≪Breviloquium≫, ≪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Itinerarium mentis in Deum≫, ≪Collationes in Hexaemeron≫, ≪De mysterio S. Trinitatis≫. ≪Quaestiones dipputatae≫ 등의 저서가 있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諡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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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밀파 [한] ∼派 [영] Bogomiles

카타리파(Catharists)의 한 분파로 이원론(二元論)을 제창한 이단. 10세기 초 불가리아 지방에서 생겨나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에 영향을 미치다가 이슬람교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들에 의하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타나엘(Satanael)이었다. 이 사타나엘이 세계와 아담을 창조하였고, 그의 아버지인 신이 아담에게 영혼을 주었다. 그런데 사타나엘이 신에게 반역하여 천국에서 쫓겨나면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사타나엘은 선한 인간을 타락시켜 벌을 받아 고통 속에 살게 하였다. 인간이 사타나엘의 영향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신은 그의 둘째 아들 예수를 인간들에게 파견하였다. 예수는 사타나엘을 정복한 후 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지상에다 성령을 남겨두고 갔으며, 유일하고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인 보고밀파에게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보고밀파는 구약성서의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아세례, 수세, 결혼, 성체 속에 그리스도가 있음, 성화상, 주의 기도를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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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감 [한] 寶鑑 [관련] 경향잡지

구한말 주간(週刊) <경향신문>의 부록으로 발간된 잡지.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과 같은 날 창간되어 1910년 12월 30일 220호로 <경향신문>과 함께 폐간되었다가 제호를 <경향잡지>로 바꾸어 그 체재대로 속간되었다. <경향신문>과는 달리 국판으로 8면씩 발간되어 읽은 뒤 책으로 제본하기 쉽게 되어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보감>은 모두 책 모양으로 제본되어 있다. 1년 동안의 것을 책 한 권으로 제본할 수 있도록 연말에는 반드시 목록을 작성하였고, <경향잡지>로 바뀌기 전 1910년까지 모두 4권 4책의 1,759면이 발간되었다. 창간호 논설에 ‘요긴한지식이라’에서 한 번 읽어 버릴 것이 아니라 책 모양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하니 이 요긴한 도리(道理)를 항상 익혀 생활토록 권장하고 있다. 법률문답과 대한성교사기(大韓聖敎史記)를 고정란으로 하여 불문(佛文)으로 된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번역하여 연재하고. 법률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순 한글로 씌어져 한글 보급운동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 <경향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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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성사 [영] sacrament of anointing of the sick [한] 病者聖事 [라] Sacramentum unctionis i

교회가 고통당하시고 영광받으신 주님께 죽음의 위험에 처한 환자를 맡겨 드려, 주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도록 하는 성사. 사제가 전례서에 규정된 기도문을 봉송하면서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예절로 집전한다.

성서에서 열두 제자는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고(마르 6:13),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앓는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야고 5:14)고 하였는데, 전자는 병자성사를 암시하고 후자는 그 보급을 시킨 증거라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해석하였다(Denz. 1695).

초대 교회에서 병자성사는 환자 자신이나 그의 친척이 축성된 기름을 바르는 사적(私的) 도유와 사제에 의한 전례적 도유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집전되었다. 전자는 가벼운 질환을 앓는 자가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고 후자는 중환자가 사제로부터 영적 도움을 얻고자 한 것인데 성사이론이 발전하지 못한 때여서 양자의 차이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9세기 이래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에 처한 자에게 마지막으로 영적 도움 즉 은총을 주기 위한 성사로 이해되었다. 이때부터 성사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마지막 도유 즉 종부성사(Extreme Unction)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13·14세기에 칠성사의 이론이 발전하였을 때 병자성사의 주요 효과는 질병을 영적으로 극복하는 성사은총을 주는 것이라 하였고 질병의 치유를 부수효과로 보았으며 병자성사를 받는 자의 자격 즉, 죽을 위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강조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병자성사를 칠성사의 하나로 규정하고(Denz. 1716) 성사의 효과로서 영적인 도움과 이에 부수하여 일어날 수 있는 육신의 질병 치유를 조화시켜 명시하였고(Denz. 1696), 성사받는 자의 자격을 죽음에 임박하지 않는 자도 가능하게 하였다(Denz. 1698).

그러므로 병자성사는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전례헌장 73) 신자에게 먼저 영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다음으로 육신적인 건강을 위하여 베푸는 성사라 할 수 있다. 병이나 노쇠로 죽음의 위험에 처한 자는 사망하거나 건강을 회복하게 되므로 병자성사도 이 두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지만 병자성사의 은총은 그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항상 질병에 대한 초자연적인 승리를 준다. 성사 은총은 환자 개인의 영신 생명에 영적 능력을 주어 신앙과 용기를 증진시킨다(Denz. 1969). 이는 병자성사를 통하여 치유자이신 그리스도와 만난 덕분이다. 그 결과 환자가 선종하면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참여한 것이므로 질병을 영적으로 극복하여 승리를 거둔 셈이 된다. 그렇지 않고 환자가 육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상관적인 단일체이므로 성사은총으로 인한 영적 위안이 육신 치유의 결과를 낳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병자성사는 치유를 계속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성사이며, 그 결과 성사 은총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건강을 주거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케 해 주는 성사인 것이다.

[참고문헌] Prudent De Letter, Anointing of the sick, Sacramentum Mundi, vol. I, Burns & Oates,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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