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회 [한] ∼會 [라] Ordo St. Benedicti [영] Benedictine Order(O.S.B.)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의 수도회칙(修道會則)을 준수하는 수도회 연합체(聯合體, Confederate)를 이르는 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베네딕토회들은 어느 한 지역에 있는 베네딕토회와 종속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을 모두 똑같이 준수하면서도 운영은 독자적으로 하고 있다. 다만 수족(修族, Congregation)이라는 연합형태가 있어, 오틸리엔(the Congregation of Sankt Ottilien)의 베네딕토회와 같이 보통 베네딕토회의 앞에 수족의 이름을 표시함으로써 전세계에 산재(散在)해 있는 많은 베네딕토회를 구별하고 있다. 분도회(芬道會)라고도 한다.

일정한 장소에 정주(定住)하면서 공동체생환을 통한 철저한 수도생황이 가장 우선적인 베네딕토회의 목적이지만 지역교회(地域敎會)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경우 반드시 대수도원(abbatial)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대수도원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혼자 생활하면서 활동해야 할 때에는 일시적 혹은 임시적으로만 활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베네딕토회 수도원 안에서의 학교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의 연구활동 및 예술활동 등의 문화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세기경 성 베네딕토가 이탈리아의 수비아코(subiaco),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테라시나(Terracina) 등지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베네딕토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 후 수도회 출신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베네딕토회 수도사(修道士)들로 구성된 선교사들을 596년 영국으로 파견함으로써 영국 내에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또 다시 1세기가 지난 뒤에는 영국에서 유럽의 독일지역으로 선교단(宣敎團)이 파견됨으로써 유럽 전지역에 베네딕토 수도회가 확산될 수 있었다.

중세 때 교회의 세속화(世俗化)로 약화된 수도정신이 아리앙의 베네딕토(Benedictus of Ariane)에 의해 앙양되었고 10세기경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을 비롯한 교회 내의 개혁운동으로 전례없던 부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적 사회질서의 붕괴와 함께 베네딕토회도 새로운 개혁의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098년에는 시토회가, 1664년에는 시토회로부터 다시 개혁시토회인 트라피스트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15-16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정비된 베네딕토회가 다시 유럽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수도회의 정신도 새로이 앙양되었다.

또, 이 시기 이후에 베네딕토회의 많은 수족들이 발족되었는데, 그 중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선교를 목적으로 독일에서 발족되었다. 이 수족은 1884년 베네딕토회의 회원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안에서는 수도자(intus monachsus), 밖에서는 선교사(foris apostolus), 그래서 포교 베네딕토회로도 불리는 이 수도회는 이러한 창설의 기본정신에 따라 다른 선교회처럼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교구와 본당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교구내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운영. 예술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전체의 사목을 돕는 데 있었다. 그러나 창설 즉시 진출한 동아프리카(현재 탄자니아)에서는 부득이 교구중심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교육사업을 통한 기본적인 선교방침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교황청 연감에 의하면 1983년 현재 전세계에 21개 베네딕토회 수족에 9,49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중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에 속하는 회원은 1,038명으로 베네딕토회 수족 중 세 번째로 큰 수족이다.

한국 진출 :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는 당시의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1909년 2월 사우어(Sauer, 辛)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가 내한하여 서울 백동(柏洞, 현 惠化洞)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함경남도 덕원(德源)을 거쳐 경상북도 왜관(倭館)에 정착할 때까지 많은 어려움과 수난을 당하였다.

① 서울시대(1909-1920년) :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본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백동 낙산(駱山) 아래 10헥타르(약 3만평)의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의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 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 이미 1909년 말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 수도원은 대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 철공 · 열차 ·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직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이 수도회는 수도생활뿐 아니라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포교수도회로서 본당사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반대로 이를 서울에서 실현시키지 못하고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 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설정됨으로써 이 지역의 포교를 위촉받아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지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 서울의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② 덕원시대(1920-1949년) :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에서는 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 한국 포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사우어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교구사목은 원래 이 회의 선교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서울의 베네딕토 회원들은 이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원산교구 통계에 의하면, 관할 내에 독일인 신부 14명, 수사 12명(3명은 한국인) 뿐이었고, 전 교구신자는 7,500명이며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인수받은 본당은 5개인데 원산(元山)과 내평(內坪) 본당이 북한지역에 있었고, 간도지방에 삼원봉(三元峰), 용정(龍井), 팔도구(八道溝) 본당이 있었다. 1926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수도원은 원산 포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 있어서의 본당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만 했다. 이에 투칭(Tutzing)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이 1925년 11월 원산으로 내한하여 본당 사목활동을 도울 뿐만 아니라 빈민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야학교인 해성학교(海星學校), 유치원, 시약소 등을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40편 덕원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1만 1,004명의 신자와 34명의 신부(베네딕토 회원 29명, 한국인 교구신부 5명>, 수녀 33명(투칭 소속 유럽인 15명, 한국인 수녀 18명)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이 밖에 덕원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오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일제(日帝)의 탄압 속에서도 이처럼 발전한 수도회는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주둔하고, 1946년 토지개혁이 실시된 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에 수도원의 모든, 장상을 비롯한 신부, 수사들은 체포되어 독일인 신부 6명과 한국인 신부 5명이 1950년 10월 처형되었고, 사우어 대수도원장 주교를 비롯한 18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54년 1월 42명의 신부, 수사, 신부들이 생환되어 2년간의 휴양을 마치고 다시 한국에서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③ 왜관시대(1952-현재) :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상트 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총원장(Erzabt)은 당시 미국에 체류중인 스위스 출신의 전 연길교구 선교사 비테를리(T. Bitterli, 李) 신부에게 한국에 다시 진출하여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회를 건설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그를 한국 베네딕토회의 장상(Superior maior)으로 임명하였다. 비테를리 신부는 일본을 거쳐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토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비테를리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崔德弘)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분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Prioratus)으로 인정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徐正吉)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 군 외에 또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왜관의 순심(純心)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전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5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토회에서는 그 후 부산과 서울에도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을 하였다. 본당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64년까지 12년간에 또 10개 본당이 증설되었다. 본당의 증설과 더불어 교회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토회원들은 종래의 프랑스 선교사들처럼 단순한 벽돌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교회와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날 뿐더러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은 명실 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대수도원(Abbatial)으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오도 하스(Odo Haas) 신부가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대수도원은 완전히 자립적인 수도원이 되었고, 한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67년에는 부산 오륜동에 한국인 베네딕토회원 중심의 새 수도원이 탄생하였고(1969년 Priorat가 됨), 1971년 4월 왜관수도원의 대원장직이 이동호(李東鎬) 신부에게 이양됨으로써 베네딕토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또한 덕원교구에서 활약하던 투칭의 포교 베네딕토회 수녀들과 연길교구에서 활약하던 스위스의 올리베타노 수녀들도 다시 한국에 진출하여 각기 대구와 부산에 수도원 공동체를 신설함으로써 베네딕토회 여자수도회도 남한에서 완전히 그 기반을 굳혔다.

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1983년 말 현재 회원 130여명, 한국인 수사신부 29명, 외국인 수사신부 17명, 한국인 수사 48명, 외국인 수사 4명 등이다.

[참고문헌] Schicksal in Korea, St. Ottilien OBY, 1954 / HWAN GAB 60 JAHRE(還甲), Munsterschwarzach 1973 / Der Funfarmige Leuchter. II.,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71 / 崔奭祐, 韓國芬道會의 初期 修道生活과 敎育事業, 史學硏究, 36, 韓國史學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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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수녀회 [한] ∼修女會 [라] Bnedictinae [프] Benedictines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의 수도회칙(修道會則)을 준수하는 여자수도회. 성 베네딕토 생존 당시 그의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St. Scholastica)가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을 따라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창설자로 알려져 있다.

창설 초기에는 지방주교와 절충된 베네딕토의 수도회칙이 사용되었는데 7-12세기에 걸쳐서 원래의 회칙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1세기에는 클뤼니의 개혁으로 전례를 강조하였으나, 그 후 베네딕토의 정신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사도회의 영향으로 영성적 깊이를 더하였다.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토 수녀회로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Olivetan St. Renedictine Sisters)와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가 있는데,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830년 1훨 9명의 동정녀들이 블룸(Joset Leonz Blum) 신부의 지도로 ‘가난한 자매들의 학원’이라는 공동체 생활이 효시가 된 후 1892년 9월 이탈리아 몬테 올리베토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회의 수족에 연합됨으로써 발족된 수녀회로서 193I년 9월 한국에 진출하였다.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는 1904년 7월 27일 성 오틸리엔(St. Ottilien)의 모원(母院)으로부터 분할 독립된 투칭(Tutzing)의 모원(母院)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투칭의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수녀들이 1925년 11월 21일 한국에 진출하였다.

①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 : 1931년 9월 한국진출. 1963년 10월 교황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설립목적은 지역사회의 여성교육과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할 봉사자를 양성하는 데 있다. 1931년 당시 연길(延吉) 교구장 브레허(T. Breher, 白) 주교의 요청으로 6명의 수녀가 처음 내한하여 연길교구 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용정하시(龍井下市) 본당에 첫 분원이 생긴 이후 1945년까지 7개의 분원이 설립되었다. 회원수에 있어서도 1939년까지 20명의 수녀가 스위스 모원으로부터 파견되었고, 1944년까지 21명의 한국인 수녀가 서원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광복 이후 러시아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한 ‘사상통일공작’에 의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월남하기 시작한 수녀들은 남한의 청주(淸州)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6.25동란 직후인 1951년 4월 유을준(兪乙濬) 의사와 함께 부산 초량동(草梁洞)에서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2년부터는 지원자들도 입회하기 시작했고,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본국으로 귀국했던 수련장 베다(Konig Beda) 수녀도 1958년 3월 다시 내한하여 수련지도를 하였다. 1962년에는 부산 동래구 광안동(廣安洞)에 대지를 마련하여 1965년 우선 수련원부터 이곳으로 이전하고 그 후 본원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49년 경기도 부천(副川), 소사(素砂)에 지원(支院)을 설립하고, 1952년에는 서울 동자동(東自洞)에 성 분도 병원을 개원하여 1967년 신축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료봉사활동 이외에도 부산에서는 1949-1980년에 걸쳐 10개의 본당에서 전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울산 · 대구 · 마산 그리고 미국의 뉴욕 등지에서도 전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교구청 사목국, 해외 교포사목 등 특수 사목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972년 12일 대리구(代理區)로 승격되어 초대 관구장에 임남훈(林南薰) 수녀가 피임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I년 6월 관구로부터 교황청 직속 수녀회로 승격되어 모원과 동한 자립수녀회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원장에 김지상(金芝尙) 수녀가 피임되었다. 1983년 12월말 현재 324명의 회원들이 부산 · 서울 · 대구 · 마산 · 울산 · 진해 · 미국의 뉴욕 등지에서 의료 · 전교 · 특수 사목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 이탈리아 · 필리핀 등에 학생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 △ 원산교구 활동 = 1920년 8월 25일 원산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성 베네딕토 남자수도회는 그 사목을 위임맡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이전하고 함경남북도의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수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당시 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는 독일의 투칭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의 수녀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4명의 수녀가 1925년 11월 21일 내한하였다. 1926년 수녀원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전교를 시작하여 그 예비자반은 후에 ‘호수천사학교’로 발전하였고 1927년 6월 6일에는 새 수녀원의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정식 수녀원(priory)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분원장으로는 마틸데 히르시(M. Mathilde Hirseh) 수녀가 임명되었고 1927년 5월 3일 첫지원자를 받았다. 1926년에 활동을 시작한 원산수녀원에서는 해성초등학교, 해성유치원, 본당활동, 호수천사빈민학교, 약방, 농아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1936년에 신설된 회령(會寧) 분원에서는 본당활동, 약방, 보통학교 등을 운영하였고, 1933년에 신설된 고산(高山) 분원에서는 본당활동, 해성 유치원, 해성보통학교, 약방, 농장 등을 운영하였다. 또한 1926년에 신설된 함흥(咸興) 분원에서는 본당활동과 학교에서의 선교활동을, 1940년 신설된 청진(淸津) 분원에서는 성심의원 운영과 본당활동을 1948년 신설된 홍남(興南) 분원에서는 본당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서양 수녀들의 일어 사용. 3개월마다의 거주신청 경신, 신사참배, 국내여행 신고. 식량난 등은 물론 1944년에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모든 학교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광복 후에도 소련군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학교와 유치원이 소련군 장교숙소와 군인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토지개척으로 인한 농토도 몰수당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정치보위부의 습격 및 체포로 모든 수녀들이 정치보위부 교화소로 옮겨졌다가 5월 16일 일부 수녀들은 수녀원으로 되돌아왔으나 곧 해산당하였고 서양수녀들은 서양신부·수사들과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54년 1월 22일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 대구에서의 활동 = 1950년부터 월남한 수녀들과 6.25동란으로 피난 나온 수녀들이 부산에서 미군들의 삯빨래 등으로 생활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흥(崔德弘) 주교의 주선으로 대구 남산동(南山洞) 본당 내 사제관 일부에서 정착하였고 1955년 1월 현 대구 신암동(新巖洞)에 건물을 신축하여 정착하였다. 1955년 3월 남한에서의 첫 지원자가 입회하였고 1955년 11월부터 북한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수녀들도 다시 내한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7월 29일 대구분원이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되고 초대 원장에는 오테마라(M. Othemara Ammann) 수녀가 임명되었다. 대구에서의 활동으로 1956년 현재 파티마의원을 개원하고 1958년에는 대구 신암동 본당에 1960년에는 반야월(般若月) 본당에 1955년에는 대구시립병원과 희망원에서 1968년에는 국군간호학교에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대구시내 3개 본당(신암동, 공평동, 동인동), 서울 시내 3개 본당(왕십리, 돈암동, 동선동), 경북 성주(星州), 상주(尙州), 김천(金泉), 경산(慶山), 함창(咸昌), 경남 마산(馬山) 각각 분원과 선교활동, 의료활동, 교육활동에 적어도 4명 이상의 수녀가 파견되어 있다. 베네딕토회의 체제는 관구체제가 아니라 본원의 원장이 해당 본원과 그에 속한 분원을 관할하면서 본원의 직접 장상이 되며 총원과 유기적 관계를 갖는데 1983년말 현재 한국의 대구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원장으로는 장피아 수녀가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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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2 [라] Benedictus

베네딕토 2세(?~685). 성인. 교황. 축일은 5월 7일. 로마 태생. 요한네스(Joannes)의 아들이다. 교황 레오 2세가 683년 6월 서거한 직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황제의 승인이 늦어지는 바람에 684년에야 공인되었다. 그는 서유럽 교회로 하여금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년)를 승인케 하고,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을 거부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재위 중 역대 교황표에 의하면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재위 : 668∼685)는 새로 선출된 교황이 황제의 승인을 기다렸다가 축성될 수 없다고 보았었다. 따라서 교황 공인권은 장기간의 공위(空位)를 방지하기 위해 라벤나의 태수(太守)에게 위임되었다.

베네딕토 14세(1675~1758). 교황(재위 : 1740-1758). 볼로냐(Bologna)의 귀족 출신. 신학 및 법학 박사. 교황 글레멘스 11세와 인노첸시오 13세 밑에서 시성 · 시복 등 교회의 주요 입법에 관여하였고 이때 ≪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canonizatione≫를 집필하였다. 베네딕토 13세 하에서 추기경과 대주교를 거쳐 174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 역대 교황의 난제였던 교회와 세속 국가와의 분쟁을 타결짓기 위해 1741년에는 사보이(Savoy) 및 나폴리(Naples)와, 1753년에는 오랜 공방전 끝에 스페인과 차례로 협상을 체결하였다. 교황령(敎皇領) 주민의 생활을 개선시켰으며 1742년과 1744년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중국인과 인도의 말라바르인의 이교적 전례를 금지시키는 교서를 발표, 오랜 논쟁을 종결시켰다. 동시에 중국의례에 대해서도 금지령을 내렸다. 적응주의에 대한 이 근본적 단죄는 근시안적인 유럽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부아시아 포교지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이어 중국에서 박해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또한 바티칸 궁전에 박물관을 신설하고 로마 및 다른 도시의 대소 성당을 복원하는 등 역사적 유물 및 건축물의 보존에 노력하였다. ‘학자들의 교황’으로 지칭될 정도로 가장 학식이 풍부한 교황의 한 분이었던 그는 교회와 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4개 학술원을 설립, 로마 대학을 진흥하고 출판사업을 활성화하였으며 또한 바티칸 박물관을 위해 필사본과 고서(古書)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고대 그리스도교의 유적을 보존하거나, 교회사와 교회법을 연구하는 많은 학회(學會) 창립과 함께 그는 스스로도 전례 없는 많은 사적(私的) 기록을 남겼으며 간소한 생활, 겸손 및 관용의 모범을 보였다.

베네딕토 15세(1854~1922). 교황(재위: 1914-1922). 제노바 교구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 선천적으로 허약했으므로 어려서부터 사색과 공부에 힘썼다. 제노바와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 1878년 서품을 받고 1882년에서 1887년 사이에 추기경 람폴라(Rampolla)의 비서로서 스페인에 머무르며 교황청의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87년 교황청 대사가 로마로 소환되었을 때 같이 돌아왔으며 1907년 볼로냐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직후 성 비오 10세가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대전 중에는 교황청의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평화통첩을 교전국에 보냈으나 거절당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 포로와 그 가족의 접촉을 위한 국제 사무소를 바티칸에 설치하고 결핵으로부터 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유럽이 승자와 패자로 분열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또 베르사이유 조약을 시인하지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전쟁 후 바티칸 주재 외교사절의 수가 25개국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에는 일본 · 네덜란드 · 영국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도 있었다. 1917년 ≪새 교회법전≫의 간행(1918년 발효)은 대내외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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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1 [라] Benedictus [관련] 베네딕토회

Benedictus(480?-550?). 아빠스. 성인. 서구의 수도회, 특히 베네딕토 수도회 창시자. 축일은 7월 11일.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ursia) 출신.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로마에서 수학. 시대의 방종을 목격하고 20세에 수비아코(Subiaco) 동굴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때 부근 수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수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너무 엄격한 규칙으로 불만을 사서 독살당할 위기에서 탈출하였다고 전한다. 수비아코에 다시 돌아오자 각기 12명의 수사들로 구성된 12개의 수도원을 각지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지역적 시기심 때문에 525년경에는 소수 수사들과 함께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로 옮겼다. 누이동생인 성 스콜라스티카(St. Scholastica, 480-547)와 같은 무덤에 묻히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바로 여기서 유명한 수도원 개혁안 및 수도규범을 제정하였는데, 그가 참조한 것은 이전의 성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us)와 성 바실리오(St. Basilius)의 규칙들이었다. 그는 서품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지적되며 그의 ‘수도규칙’은 외곬이고 침착 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몬테 카시노에서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지은 베네딕토회칙은 수많은 남녀 수도회의 규범으로 아직까지도 준수되고 있다. (⇒) 베네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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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긴회 [한] ∼會 [영] Begines

12세기 네덜란드 지방에서 창립된 여신자(女信者)들의 단체. 신체장애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교육활동에 종사한다. 수도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하지만 수도회는 아니다. 재산의 사유(私有)도 가능하고,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히 개인의 자유다. 베긴회란 명칭은 창립자 베그(L. le Begue)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2-3인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주거지는 beguinage라고 부른다. 이 주거지는 경제적으로 독립된 단위이고,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다.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도, 그들을 관할할 원장도 없었으나 그들 중 일부는 프란치스코 제3회의 규칙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베긴회는 교육활동과 자선사업을 통하여 교회의 발전을 윙해 상당한 기여를 하였지만 당시 유행했던 오류와 이단에 빠져 빈 교회회의에 의해 배척당하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거의 소멸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내려온 회원들도 있다. 이들은 병자를 간호하고, 레이스를 짜면서 생활비를 조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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