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래 [한] 朴秉來

박병래(1903-1974). 의학박사. 성모병원 초대 원장. 본관(本貫)은 밀양. 세례명 요셉. 호(號)는 수정(水晶). 동성상업학교장을 지낸 박준호(朴準鎬)의 아들. 충남 논산(論山) 출생으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하고 1936년부터 성모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20년 동안 봉직하면서 서울교구 의료사업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의학상식의 보급을 위해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등에 고정필자로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 가톨릭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6.25사변 중 군의관으로 입대, 가톨릭의사협회원들과 함께 수복지역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1956년 2대 성모병원장과 가톨릭대학 의학부 3대 학장을 겸임하는 한편, 혜화동 본당 총회장으로 성당신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성모 병원장과 가톨릭대학 의학부 학장직에서 물러나 성 루가병원을 개원,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원으로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을 따라 많은 가난한 환자를 돌보았다. 1974년 5월 15일 오랜 숙환으로 사망했는데, 사망하기 전 1930년부터 일제의 문화재 수탈을 방지할 목적으로 자신이 수집한 362점의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추도사에서 “성실과 사랑에 찬 고매한 인격으로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고쳤던 인술(仁術)의 실천자”라고 추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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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학교 [한] 博文學校

1900년 김교원과 강준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인천 박문국민학교의 전신이다. 1909년 프랑스 선교사 드뇌(Eugene Deneux) 신부가 학교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여자부를 병설하였다. 1917년 2개의 학교를 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시 중구 답동 3번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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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마르타 [한] 朴∼

박마르타(?~1868). 순교자. 고종(高宗)의 유모. 1866년 남종삼(南鍾三)이 조정에 러시아 세력의 견제를 위한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할 당시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의 심부름으로 궁궐과 조정의 반응을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에게 전해 주었다가 방아책이 무시되고 오히려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충청도 홍천(洪川)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868년 2월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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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행 [한] 朴道行 [관련] 프와넬

프와넬(Poisnel) 신부의 한국명. ⇒ 프와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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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원 [한] 朴來元

박내원(1860-1935). 공소회장. 자(字)는 용진(龍津),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도 정산(定山) 함박실에서 영동현감(永同縣監)을 지낸 박상호(朴尙浩)의 9남매 중 6남으로 태어났다. 병인박해 중 1868년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현감(海美縣監)에게 재산을 약탈당한 뒤 석방되었으나 부친은 질병으로 사망하고, 자신은 해미현감의 집에 잡혀 있다가 2년 뒤 형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1879년 권 아폴리나와 결혼한 후, 1880년 황해도 장연(長淵) 배마당으로 이주, 공소회장을 맡아보면서 그해 11월 해로(海路)로 입국한 뮈텔(Mutel, 閔德孝),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를 맞아 2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서 보호하며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 재산을 빼앗기고 경기도 연천군 남면 신암리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하갓둥이를 거쳐 수원 고색동에 정착, 말년을 보냈다. 1935년 1월 26일 사망, 경기도 남곡리의 양지본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2남은 박동헌(朴東憲, 마르코, 1893-1948) 신부이고 장남 원하(元夏, 필립보)의 아들이 서울교구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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