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메트 [원] Mahomet, Mohammed(Muhammad) [관련] 이슬람교

Mahomet, Mohammed(Muhammad)(570?-632). 이슬람교(Islam)의 창시자이며 아랍 제국의 창건자. ‘마호메트’란 ‘찬양받는 자’, ‘뛰어난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중요성을 지닌 종교적 · 사회적 · 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그의 생애는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다. ① 예언자의 소명을 받기까지의 약 40년간에 걸친 초기의 종교적 활동, ② 610년 아라비아의 예언자로서 선언하고 순례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여, 622년 7월 15일 메카에서의 박해가 심해져서 메디나로 떠난 ‘히즈라’(hijrah) 즉 ‘이주’ 시대, ③ 622년부터 그가 숨을 거둔 632년 사이에 메디나에서 이슬람교를 통하여 종교와 국가를 창시하는데 성공한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가난한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명족 쿠라이시의 출신이며 할아버지는 하심(Hashim)족의 우두머리였으나 메카 정계의 지도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호메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압드 알 무탈립의 보호 아래 있다가, 여덟 살 때는 할아버지도 여의어서, 삼촌 아부 탈립의 돌봄을 받으며 시리아 등지로 삼촌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대상(隊商)의 심부름꾼이므로 생활정도도 낮았고, 양과 염소를 키우며 그는 스스로 “하느님은 목자 가운데서 예언자를 불렀다. 모세와 다윗을 보라”고 하였다. 595년께 25세인 그는 아사드족의 카디자(Khadijah)라는 약 40세 난 부자 과부의 상업을 책임맡았는데, 이 때 청혼을 받고 결혼하였다. 아들 셋, 딸 넷 모두 7남매를 낳았으나 아들은 어려서 죽었으며, 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마호메트의 사촌 알리의 부인인 파티마였다. 마호메트가 알리를 양자로 삼았으므로 알리와 파티마가 낳은 아들들이 마호메트의 후계자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초년기에 겪은 가난과 고아 신세나 다름없던 불행 탓인지 때때로 메카 근처에 있는 한 언덕의 동굴 안에서 밤을 지새는 습관을 가진 사려 깊고 고결한 사람이었다. 상업중심지 메카의 거상들이 대상에 의한 교역 거래의 독점권을 획득하고 번영하고 있지만, 상인들은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쏠려,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전통적인 의무에 대하여는 소홀하였다. 마호메트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명상하면서, 610년 그의 나이 40세 때, 히라산 동굴에서 알라(Allah)의 신탁에 접하여, 뒤에 천사 가브리엘과 동일시되는 위엄 있는 존재의 환상을 보았으며, “너는 신의 사자(rasul Allah)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예언자되기를 결심하여, 알라 중심의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창립하고, 공공연히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무슬림’(Muslimun) 즉 모슬렘(Moslems)이라고 호칭되었다. 알라는 전능자, 창조주, 심판자이며 이슬람이란 신에 대한 ‘복종’의 뜻이다.

교도가 불어나고 우상 숭배를 공격하여 반대파와 토론하며 기적도 행하게 되는 동안에 박해가 심해져서 약 80명이 아비시니아로 피난하였고, 그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히즈라’인데, 이 이주가 일어났던 아랍력의 첫날, 즉 622년 7월 16일부터 이슬람교의 기원(AH, Anno Hegirae)이 시작되었다.

메디나에서의 정착 기반을 다지며, 마호메트 자신은 623년에 시리아로 가는 메카 대상들을 상대로 세 번에 걸친 ‘약탈’(ghazawat)을 주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 그는 자신이 예언자임을 인정받기 위하여 유태인들에게 양보하던 태도를 버린 뒤 “유태인들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슬람교의 아랍적인 성격을 특별히 주장하였다. 625년 메카의 세력을 강력하게 활성화시키고 있던 아부 수피안이 메디나의 오아시스로 쳐들어오자 마호메트와 그의 무슬림들은 이를 극복해 내는데 힘썼다. 627년에도 수피안이 이끄는 1만 명의 동맹군은 사막에서 하룻밤의 비바람을 만나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마호메트는 ‘메디나의 헌장’으로 알려져 보존되어 오는 한 문서에 나타난 합의 조항에 따르면, 여덟 아랍씨족들과 메카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을 합친 아홉 파의 집단들 사이에 전통적인 아랍혈통들의 한 동맹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이슬람교단의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긴 안목을 가진 지도자이며 군사 사령탑이기도 하였다. 자신의 국가의 확장을 위해 유태교와 그리스도교, 기타 종족을 정복하고, 628년에는 메카로 진격하여 카바와 그 인근 몇몇 신당들 안에 있는 다신교(多神敎)의 우상들을 무너뜨렸다.

추종자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그는 부유한 메카인들로부터 대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에서 군사적으로 막강해진 그는 동맹 맺기를 원하는 경우의 조건으로 무슬림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워 아라비아 전역의 통일을 이룩하고, 632년 3월(이슬람曆 10년) 메카신전을 순례하고 나서, 메디나에 돌아와 그해 6월 8일 열병으로 숨졌다. 그가 신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과 관련되는 사건들은 650년째에 수집·기록되어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Koran)에 남겨졌다. (⇒) 이슬람교

[참고문헌] R. Bell, The Origin of Islam in its christian Environment, 1926 / A.J. Wensinck, Mohammad en de Joden te Modina, Leiden 1928 / W. Montgomery Watt, Muhammad at Mecca, New York 1953 / M. Ibn Ishaq, Sirat Rasul Allah(The Life of Muhammad), tr. A. Guillaume, London 1955 / W.M. Watt, Muhammad at medina, New York 1956 / M. Hamidulah, Le Prophete de l’Islam, 2권, Paris 1959 / New Catholic Encyclopedia, McGraw-Hill Book Company, 1969 / John Bagol Glubb, The Life and Times of Muhammad,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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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송 [한] 馬海松

馬海松(1905-1966) 아동문학가. 수필가. 본명은 상규(湘圭), 해송은 호(號),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개성(開城) 출신.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중퇴하고, 1920년 보성학교(普成學校)에 입학했으나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문예지 <여광>(麗光)의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도일, 니혼 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여, 홍난파(洪蘭坡) 등과 극단 동우회(同友會)에 가입, 국내 각지를 순회 공연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22년 공진항(孔鎭恒) 등과 문학동인 녹파회(綠波會)를 조직하고 이듬해 송도 소녀가극단을 도와 지방을 순회하며 자신의 자작동화를 구연(口演)했으며 1924년 방정환(方定煥) 등과 색동회를 조직, 어린이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맡는 한편 이해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에 입사, 편집장과 선전부장을 지낸 후 1930년 <모던 닛뽕>을 창간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송도 학술연구회 위원장, 국방부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정훈국 편집실 고문 등을 역임하고 1951년 공군 종군문인단 단장을 지냈다. 1957년 어린이헌장(憲章)을 기초하고 이듬해 영세,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959년 제6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때부터 마을문고 보급회 명예회장으로 독서운동의 보급에 힘썼다. 1961년 대한소년단 이사로 임명되었고 1962년 서울시 시민헌장(市民憲章)을 기초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1964년 고마우신 선생님상, 제1회 한국문인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11월 6일 뇌일혈로 사망, 문인장(文人葬)으로 장례가 거행된 후 금곡 천주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세계는 초기의 탐미적 경향에서 점차 현실 풍자, 비판하는 경향으로 기울었으나 말기에는 가톨릭의 수용으로 맑고 깨끗한 아동 세계의 순화와 보호를 표현하였다. 저서로 동화집 ≪홍길동전≫, ≪해송동화집≫, ≪토끼와 원숭이≫, ≪모래알고금≫, ≪앙그리께≫, ≪멍멍나그네≫ 등과 수필집 ≪편편상≫(片片想), ≪전진(戰塵)과 인생≫, ≪사회와 인간≫, ≪씩씩한 사람들≫, ≪요설집≫(饒舌集), 그리고 자서전 ≪아름다운 새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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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 [라] Matthias [영] Matthias

사도. 축일은 5월 14일. 12사도의 한 사람. 마티아는 12사도의 한 사람이던 배반자 유다(Judas Iscariot)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요셉(Joseph Barsabbas)과 함께 추천되어, 제비를 뽑음으로써 사도로 정해졌다. 그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처음에 유다(예루살렘)에, 이어서 이방(異邦),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포교했다고 한다. 순교의 죽음에 관해서는 십자가형, 참수, 석살(石殺) 등 여러 설이 있다. 유골은 성 헬레나(Helena)에 의해 로마로 옮겨지고, 그곳으로부터 아그리치오(Agricius, ?-322년경) 주교에 의해 독일의 트릴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것이 1127년에 발견되자 유골은 다시 베네딕토회 성 마티아 수도원 성당 내에 옮겨 안치되었다. 머리 부분은 트릴 주교좌 성당에서 전람되고 있다.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십자가형을 당한 후 도끼나 미늘창으로 시체가 토막내어져 순교했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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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의 복음서 [한] ∼福音書 [라] Evangelium secundum Matthaeum

1. 필자 및 독자 :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60-130년경 생존)와 그의 설을 따른 프랑스 리용의 주교 에이레나이오스(130-200년경 생존)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열 두 제가 가운데 하나인 세관원 마태오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집필했고 후대의 어느 누가 그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는 설이 전통적 학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서의 세밀한 검토 결과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인 예수 어록과 마르코 복음서를 참고하여 직접 그리스어로 집필한 것임에 틀림없음이 밝혀졌고 따라서 예수의 직제자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다는 종래의 설은 따를 수가 없게 되었다. 복음서 자체의 검토 결과 필자는,

①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집필한 것으로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그리스도인이요, ② 히브리어 및 아람어에 익숙하고 유태교 계율과 유태인들의 관습을 익히 아는 유태계 그리스도이이며, ③ 필자는 성전세를 바치고(17:24-27),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권위를 인정하며(23:2-3), 십일조를 바치고(23:23),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24:20). 그렇지만 예수와 사도들을 배척한 유대 민족을 단죄하며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통박한다(23장). 그러면서도 율사들의 주석 방법을 따른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필자는 본디 유태교 율사로 행세하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 사람을 편의상 마태오라고 할뿐이다.

이 복음서의 독자 문제는, 필자가 세 차례에 걸쳐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번역해 준 사실(1:23, 27:33, 27:46)을 제외하고는 독자들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낱말이나 표현을 이해한다고 전제하고 그대로 사용한 사실이나 또는 독자들이 유태교의 계율이나 유태인들의 풍습을 이해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아무런 설명 없이 기술하는 예로 미루어 필자는 유태교 분위기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하겠다. 정확히 말해서 독자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호의적이기는커녕 매우 비판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을 단죄 내지 규탄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방인들 편을 들어 이방인들의 구원과 전도에 주력하라고 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마태오 복음서 독자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태계 그리스도 교회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유태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독자적인 종교단체로 독립하여 유대교와 맞서고 있었다(5:17-48, 23장). 이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벗어났으니 유태인들과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혼성교회로서 주로 이방인 전도에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2. 사료 : 마태오는 대체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따르면서, 아울러 예수 어록과 자기 나름대로 수집한 특수 사료를 수용했는데, 비슷한 말씀들이나 사화를 주제별로 한 자리에 모아 놓기를 즐겼다. 마태오가 수용한 사료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① 마르코 복음서 :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서를 옮겨 쓰되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삭제, 축소, 확장, 수정, 중복을 했을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배열을 바꾸기도 하였다. ② 예수 어록 : 루가가 대체로 어록의 순서를 존중하면서 큰덩이로

잘라 3-4, 6-7, 9-17장에 집중적으로 옮겨 실은 데 비해 마태오는 어록의 순서를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 3-13, 16-20, 22-25장에 흩뜨려 놓았다. 마태오 복음서 가운데 어록에서 따온 부분은 일흔이 좀 넘는다. ③ 마태오의 특수 사료 : 오직 마태오만이 수집하여 수록한 사료를 일컬어 마태오의 특수 사료라 한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있는 특수 사료들을 살펴보면 육십여 개다.

3. 편집 사상 ① 구조 ㉮ 전사(前史, 1-2장) : 예수의 공적 활동 이전의 먼 과거 이야기이다. 마태오는 특수 사료를 이용하였다(예수의 족보, 수태와 탄생, 동방 점성가들의 예방, 이집트 피신 이야기). ㉯ 활동 준비(3:1-4:11) : 예수의 공적 활동 직전의 이야기(요한 세례자의 활약사화, 예수의 세례사화, 유혹사화). ㉰ 갈릴레아 활동기(4:12-18:35) : 마르코의 1:14-9:50의 구조를 따르면서 마르코, 어록, 특수 사료의 말씀들과 기적들을 주제별로 모으곤 하였다. ㉱ 예루살렘 상경기(19:1-20:34) : 갈릴레아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교외에 도착하실 때까지의 일들을 수록하였으며 주로 마르코 10장을 따르면서 특수 사료에서 하늘 나라를 위한 독신에 관한 단절어(19:10-12)와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20:1-16) 말씀을 수집, 삽입하였다. ㉲ 예루살렘 활동기(21:1-28:20) :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주로 마르코 11-16장을 따르면서 예수 어록 및 자기의 특수 사료를 더러 삽입하였다.

② 그리스도론 : 마태오는 예수를 유태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확신하면서, 그분은 예언의 성취자요 율법의 참 해석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 예언의 성취자 : 신약성서 필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구원을 이룩하셨다 한다. 특히 마태오는 예언과 성취의 도식으로 예수 사건을 풀이하였다. 마태오는 우선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예수는 메시아이시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나아가서는 유태교인들을 상대로 예수 메시아 신앙을 옹호하려고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애용하였다. ㉯ 율법의 참 해석자 :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완성하였다(5:17-18). 그러나 예수께서 율법의 세칙 하나하나를 고수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세칙보다 하느님의 뜻을 중히 여기셨던 것이다(12:50, 15:4, 19:6-8, 21:31). 여기서 마태오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세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 하느님은 십일조보다 자비를 바라신다(9:13, 12:7, 23:23) △ 율법은 저 유명한 황금률로 환원된다(7:12). △ 율법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된다(22:40). 마태오는 이처럼 예수께서 밝혀주신 율법의 참 뜻을 익히고 행하는 사람만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였다.

③ 교회론 : 마태오 복음서 필자는 교회문제에 남달리 많은 관심을 쏟았다. 우선 복음서 필자들 가운데서 그만이 ‘교회’라는 낱말을 두 차례 썼다(16:18, 18:17). 또한 그는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교직자, 교회 규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절박한 문제들을 깊이 다루었다. 이제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자.

㉮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 :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백성’이다(2:6). 예수께서는 오직 이들에게 파견되셨고(15:24) 또한 이들에게만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셨다(10:5-6). 그러나 이 민족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배척했고 군중은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고함을 질렀다(27:24-25).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음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절대 다수는 그분을 적대시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10:23, 23:34-36). 그 결과 이스라엘은 서기 70년 제1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는 역사적 비운을 이미 겪었고(22:7), 또한 장차 종말에는 하늘 나라에서 쫓겨나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8:12). 물론 이스라엘 전부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고 열 두 사도를 비롯하여 소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 절대 다수는 이방민족들이었다(21:43, 22:9-10, 28:19-20).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여 마태오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백성’일 수 없고 그 대신 소수 유태인들과 다수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교회가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 교회는 한편으로 하느님의 옛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대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독자적인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양자간의 유대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성전세를 바치고(17:24-27)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가르침을 인정했으며(23:2-3) 십일조를 바치고(23:23) 안식일도 지켰던 것이다(24:20). 이와는 반대로 마태오의 교회가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으니, 우선 유태교 회당을 가리켜 절대로 우리 회당이라 하지 않고 ‘그들의 회당’ 또는 ‘여러분의 회당’이라 했던 것이다. 사실 마태오 소속 교회는 예수를 구약에 예고된 메시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론과 오직 그분의 율법 해석만을 따르는 윤리관을 수립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취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태교인들로부터 모진 박해를 겪었던 것이다(10:23, 27:34-36).

끝으로 예루살렘 모교회 및 바울로계 교회와 비교하여 마태오 교회의 성격을 밝혀보자. 예루살렘 모교회 신도들은 모두 유태인들로서 이들은 조상 전래의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아울러 예수를 메시아로 받들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 받고 전해 주는 일을 중요시한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터키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이방인들의 교회들을 설립한 바울로는 유태교의 율법을 배척하고 오직 그리스도 신앙만을 주창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작용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마태오가 소속한 교회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 모교회와 바울로계 교회들 중간 지점인 시리아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그 신학 노선도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율법의 유효성을 일단 인정하되 유태교 율사들의 자구적 해석이 아니라 율법 전부를 경천애인으로 환원시키신 예수의 새로운 해석을 따랐던 것이다. 또한 마태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작용도 결코 경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데 주력한 것 같다.

㉯ 교직자 : 서기 58년경 사도 바울로가 성전에서 체포될 무렵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사촌동생 야고보가 이끄는 원로단이었다(21:18). 그러나 바울로 자신이 설립한 여러 교회에는 원로들이 없고 그 대신 다른 부류의 교직자들이 교회를 보살폈다. 마태오가 소속한 시리아 지방 교회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큰 영향을 끼쳤고 그밖에도 율사들, 현자들, 예언자들, 의인들이 행세하였다. 여기서는 오직 베드로, 율사들, 예언자들의 됨됨이만 살펴보자.

베드로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였다(16:17-19). 단절어의 뜻인즉 베드로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매고 푸는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 권한 내용과 범위를 두고 여러 가지 풀이가 능하나, 우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참된지 거짓된지 식별하는 권한(신앙의 차원 16:16)과 예수께서 밝혀주신 규범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권한(윤리적 차원 18:15-17)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권한을 논할 때에는, 예수께서 교회 공동체에도 똑같은 권한을 주시는 말씀(18:18)에 유념하여, 베드로의 권한과 교회 공동체의 권한을 함께 고찰할 것이다. 즉, 베드로가 매고 푸는 권한을 행사할 때는 혼자서 임의로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 공동체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여 베드로는 마땅히 교회 공동체의 의사를 수렴하는 방식으로 자기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교회 일치의 구심점 구실을 하는 인물인 셈이다.

베드로 다음으로 돋보이는 교직자들은 그리스도 교계 율사들이다(13:52, 23:34). 이들은 예로부터 전해 온 유태교 율법과 예수께서 새롭게 풀이하신 율법해석을 다 익히고,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로 말미암아 실현된 사실을 다 익힌 자들로서, 이들이야말로 예언자들과 현자들과 함께 마태오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유태교 율사들이 선생 ‘아버지’ 지도자라 불렸듯이 그리스도교 율사들도 같은 존칭으로 불렸을 것이다. 아마도 마태오는 이런 관행에 반대하여, 절대로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그런 존칭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23:8-10). 이어서 마태오는 모름지기 교회 직책은 봉사직이니 만큼 겸손하게 자기 직무를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여 놓았다.

다음에는 예언자들을 살펴보자. 1세기 시리아 지방 교회에 유랑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증거는 50-60년대에 쓰인 ≪예수 어록≫, 80년경에 쓰인 ≪마태오 복음서≫, 100년경에 쓰인 ≪열 두 사도의 가르침≫ 등에 두루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예언자들에 관한 ≪마태오 복음서≫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그들은 가족과 재산과 고향을 버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10:41, 13:57) 예언과 구마와 치유 활동을 하다가(7:22) 유태인들에게 박해를 받기 일쑤였다(5:11-12, 23:34). 그런데 참 예언자가 있으면 으레 거짓 예언자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양자를 식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론적 식별기준(1고린 12:3), 그리스도인들의 공익에 기여하는 교회론적 식별기준(1고린 12:7)을 내세운 바 있다. 이제 마태오는 예수께서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키신 율법을 지키면 참 예언자요 이와는 반대로 범법을 일삼으면 거짓 예언자라는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였다(7:23).

㉰ 교회 규범 : 마태오는 마르코와 어록과 특수 사료의 단편 전승들을 종합하여 18장을 엮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마땅히 자기 교회에서 지킬 규범들을 제시하는 까닭에 18장을 일컬어 ‘교회규범’이라 한다. 마태오는 이로써 일종의 교회론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에 근거하고 다시금 그의 그리스도론은 신론에 근거한다는 점을 유념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말씀하고 처신하셨듯이(26:39·42), 교회도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언행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鄭良謨)

[참고문헌] J.D. 킹스베리 저, 황성규 역, 선포주석 마태복음, 컨콜디아사, 1983/ H.C. 웨첸 지음, 강요섭 옮김, 마태복음 연구; 사람됨의 기원과 운명,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 정양모 역주, 마태오복음서, 분도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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