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ke, John(1632~1704). 영국의 계몽철학 및 경험론의 창시자. 사마센토샤의 린튼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 · 자연과학 ·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1700년까지 관직에 재직하였다. 그는 데카르트 철학과 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여 스콜라철학에 반대하였다. 1690년에 출판한 ≪인간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제4권은 경험론, 내재적 현상론(內在的 現象論)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철학의 근본과제로 삼아 버클리와 흄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근대 인식론이 칸트에 의해 완성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제1권에서는 데카르트와 케임브리지의 플라톤 학파가 주장한 본유관념(本有觀念)을 부정하였다. 제2권에서 사람의 지식은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 단순관념에서 복합관념으로 나아간다고 주장, 인간의 마음은 출생시엔 백지(白紙)와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지 위에 관념이 새겨짐으로써 인간은 지식을 갖게 되는데 이 관념의 원인을 감각과 반성을 통해 인식되는 물성(物性)이라 하였다. 물성을 객관적인 제1성(형태, 크기, 수 등)과 주관적 제2성(빛깔, 향기, 맛 등)을 구별하였다. 제3권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象)을 비판하면서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 보편개념을 정의, 설명했다. 제4권에서는 주로 이상의 것을 포함하여 지식의 확실성 · 종류 · 가능성 등을 논하였다. 그는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지식을 관념과 대상 사이의 관계로 파악치 않고 관념과 관념 사이의 일치. 불일치 관계로 규정하였다. 또 그는 쾌락주의 · 행복주의적 경향의 윤리관을 가졌고 도덕은 신의 법, 자연법, 국법과 일치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로크의 유명한 정치사상은 계약설(契約說)로 홉즈의 전체주의를 자연상태보다 더욱 악하다고 하여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했고, 대의제에 의한 민주주의, 삼권분립, 이성적인 법에 의한 통치, 국민의 자유 등을 강조하여 프랑스혁명, 미국의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사상은 서양의 민주주의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 ≪Two treatises of government≫(1690),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1673),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1695) 등이 있다.
로코코양식 [한] ∼樣式 [영] Rococo art
18세기초에 파리에서 시작되어 곧 프랑스 전역과 독일, 오스트리아로 확산된 장식적인 미술양식을 나타내는 용어. 일반적으로 로코코 양식은 웅장하기보다는 아름답고 장식적이며, 공간보다 선(線)이 강조된다. 특징은 표면의 장식적 처리(당초 무늬, 소용돌이 무늬, 조가비 세공 등)로 좌우 대칭보다는 비대칭이 규칙이다. 회화에 있어서는 와토(Antoine Watteau)와 부세(Fransois Boucher)의 작품들이 가장 전형적이며, 건축에 있어서는 샹티니의 푸티 샤토 내의 황태자의 살롱과 파리의 오델 드 수비즈의 살롱이 좋은 예이다. 또한 로코코 양식의 모든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의 일부는 독일에서 발견되는데, 바이에른의 리히텐펠스 부근에 있는 피르테하일리겐 교회와 뮌헨 근방의 비스키르케 교회가 가장 훌륭하다.
로즈 [원] Roze, Pierre Gustave
Roze, Pierre Gustave(?-?).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해군소장. 중국명 노세(魯勢). 중국 천진(天津)에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중 1866년 7월 병인(丙寅)박해로 조선을 탈출하여 천진에 온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후의 6대 조선교구장) 신부를 만나 조선에서의 박해상황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포함한 프랑스 선교사 7명의 처형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프랑스 해군성(省)과 북경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onnet)에게 보고한 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과 천주교 탄압에 항의하는 뜻으로 조선정벌을 결심, 해군성의 허락을 얻어 이해 9월 조선해안 정찰차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양화진(楊花津)에 이르렀다(병인양요). 이어 10월에는 다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에 상륙,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결국 문수(文殊)산성과 정족(鼎足)산성의 전투에서 패하자 강화성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다.
결과적으로 로즈 제독의 강화도 점령은 그 뒤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南延君)묘 도굴사건과 함께 조선 정부로 하여금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더 가열시키게 하는 계기를 주었다.
[참고문헌] 敎會史硏究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로시 [원] Rossi, Giovanni Battista de
Rossi, Giovanni Battista de(1822~1894).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창시자. 로마에서 출생. 로마대학(1838~1840년)과 사피엔자(Sapienza)에서(1840~1844년) 법학을 공부한 뒤 예수회원 고고학자 마르치(G. Marchi)의 지도로 카타콤바의 연구를 시작(1841년)하였으며 그 뒤 바티칸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바에서 교황 고르넬리오의 무덤(1852년)과 3세기 교황들의 유물을 간직한 분묘(1854년) 및 성 세실리아(1854년)와 성 에우세비오(1856년)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프레텍스타토(1863년)와 도미틸라(1864년)의 카타콤바, 네레오와 아킬레오(1873년)의 바실리카, 히폴리토(1882년)와 펠리치타스(1883년)의 무덤 등에서 나온 파편과 고기물(古器物)을 면밀히 조사하여 로마의 고대 그리스도교인 묘지의 인쇄법을 해명하였다. 대표작 ≪Roma sotterranea cristiana≫(3v., Rome 1864~1877)에서 성 갈리스도와 성 제네로사의 카타콤바를 설명하였고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동료들과 함께 (1864~)를 창간 편집하여 그리스도교 금석학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을 공동기획하고 첫 두 권 ≪Inscriptiones christianae urbis Romae septimo saeculo antiquiores≫(1861~1888)를 편집하였다. 신문, 잡지에 그리스도교 고고학과 금석학에 관하여 기고한 논문을 모은 34권의 논문집이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로셀리노 [원] Rosellino, Bernardo
Rosellino, Bernardo(1409~1464).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일명 Rosellini. Metteo di Domenico Gambarelli의 아들, Antonio Rosellino의 스승이자 형. 그의 조각작품으로는 피렌체에 있는 빌랴냐(Beata Vkllana) 및 브루니(Leonardo Bruni), 그리고 피스톨라에 있는 라차리(Filippo Lazzari)의 각 무덤장식 등이 있다. 건축작품으로는 피렌체의 루첼라이(Ruccellai) 궁전, 아레초의 미제리코르디아(Misericordia) 성당 정면, 피엔차의 피콜로미니(Piccolomini) 궁전, 피엔차 대성당 등이 있으며, 그는 바티칸 궁전에 고용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