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란궁전 [한] ~宮殿 [영] Lateran Palace

4~14세기까지 거의 1,000여년 동안 역대 교황들이 거주하였던 교황궁전. 원래 이 궁전은 황제 막시미아누스가 그의 딸의 결혼식 지참금으로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준 것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다시 당시의 교황 멜키아데스에게 기증하였다. 그 후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 궁전은 서방교회 행정의 중심지였다. 두 번의 화재로 원형이 파괴된 것을 교황 식스토 5세가 재건하였고 교황 비오 11세가 라테란 궁전에다 ‘카타콤브비문과 고대 그리스도교 예술박물관’을 설치하였으며, 1929년 라테란조약도 이 궁전에서 맺어졌다. 이 조약에 의해 이 궁전과 부속 건물들은 교황청에 소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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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란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Lateranense [영] Councils of Lateran [관련] 공의회

①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 (제9차 공의회) : 교황 갈리스도(Callistus) 2세가 소집. 보름스 정교조약(1122. 9)을 재확인하여 임직권 논쟁을 종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300명의 주교 및 대주교, 그리고 600여명의 서방 대수도원장들이 참석하였다. 공의회의 공식의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22개(혹은 25개)의 교회법규가 공포되었다. 이들은 대개 랭스(Reims) 공의회(1119년)의 법규와 같은 이전의 법규를 재확인하는 것이었는데 임직과 영성적 직무, 성직자 그리고 교회와 재산, 사람, 장소 등의 보호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공의회는 전세기에 시작된 교회의 개혁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② 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년) (제10차 공의회) : 1130년의 교황선거에서 인노첸시오(Innocentius) 2세와 아나클레토(Anacletus) 2세가 이중으로 선출되어 일어난 분열대립이 후자의 죽음(1138년)으로 종식되자 교회일치를 확인하고 교리와 규율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인노첸시오 2세가 소집하였다. 동방교회에서 온 약간의 참석자들을 포함하여 500~1,000명의 주교, 대주교 및 대수도원장이 참석하였는데 개회연설에서 교황은 아나클레토의 추종자들의 성직을 박탈하고, 이단자들의 파문과 단죄를 선언하였다. 제1차 라테란 공의회와 같이 전세기부터 시작된 교회개혁의 목표를 추구하여 교리와 권위, 주교, 성직자, 수도자, 교회들의 권리 등의 문제를 다룬 30개의 교회법규가 공포되었다.

③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년) (제11차 공의회) : 1159년 알렉산데르(Alexander) 3세의 선거에 뒤이어 시작된 3대의 대립교황에 의한 교회 분열이 1177년 베네치아에서의 교황 · 황제조약으로 종식되면서 알렉산데르 교황이 소집하였다. 300여명의 주교들 외에 대수도원장 및 각국의 고위성직자 다수가 참석하였는데 교황권의 상승과 교회개혁, 그리고 교회법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공포된 법규들은 1234년의 그레고리오(Gregorius)의 교회법전에 수록되었는데 주로 성직자의 규율과 권력 남용, 제재조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중요한 법규는 교황선거에 관한 것으로 선거를 추기경단만이 할 수 있게 하였으며 3분의 2 이상의 다수표를 얻어야 교황으로 선출되게 하였다. 또한 모든 주교좌 성당에는 성직자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

④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제12차 공의회) : 중세공의회 중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에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서 중세 교황권의 융성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1204년)에 이어 새로이 십자군을 소집하고 알비파(派)와 같은 교회 내의 이단을 추방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 수석 대주교들은 물론,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들을 포함하여 서구교회 전역에서 400여명의 주교 및 대주교가 참석하였다. 최초로 교황명의로 선포한 70개의 교회법 외에 십자군 원정에 대한 교령도 발표하였다. 성체에 관한 교리에서 ‘실체변화’(實體變化, transsubstantiatio)라는 말이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신자는 최소한 1년에 한 번 고백성사를 할 것이 명시되었다. 대성당에서의 설교에 관한 규칙도 정해졌는데, 주교의 교사로서의 의무가 다시 환기되었다. 또한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이 금지되었으며, 이 결과로 성 도미니코(St. Dominicus)의 설교 수도회는 회칙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도규칙을 채택해야만 하였다.

⑤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512~1517년) (제18차 공의회) : 프랑스의 루이(Louis) 성왕(聖王)에 의해 소집되어 공의회수위설이 우세했던 피사(Pisa) 공의회의 교령들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교황 율리오(Julius) 2세가 소집하였다. 수세기 동안 교회일치를 위한 목적이 의심되었으나, 현재는 공의회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최초의 회기에는 70여명의 주교 및 대주교와 약간의 대수도원장과 제후의 사절들이 참석하였다. 교회법이나 교령이 선포되지는 않았지만 교황헌법이 교황의 권위 하에 공포되었다. 교회개혁을 위해 소집되었으나 개혁의 주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교회는 곧 프로테스탄티즘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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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코르데르 [원] Lacordaire, Jean Baptiste Henri

Lacordaire, Jean Baptiste Henri(1802~1861).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제자였으나, 개종하고 사제가 되면서 라므네(H.F.R. de Lamennais)에게 사사하였다(1824년). 라므네가 파문당한 후 그와 헤어져 근대사상과 가톨릭 교회와의 조화를 위해 힘쓰며, 노트르담에서 10년 가까이 강연회를 계속하여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다(1835년~ ). 로마에서 도미니코회 수사가 되어(1739년~ ), 1790년 이래 쇠퇴하고 있던 동회를 프랑스에서 부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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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리스트회 [한] ~會 [라] Lazaristae [관련] 선교수도회

1625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선교수도회(宣敎修道會)의 별칭(別稱)으로, 선교수도회의 본부가 파리 생 라자로 거리(Saint Lazare)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별칭이 생겨났다. (⇒) 선교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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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마을 [영] St. Lazarus Village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 87번지 소재의 나환자 정착촌. 1945년 광복 후 서울 근교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나환자들을 접한 메리놀회 소속 캐롤(George Carroll, 安) 주교는 이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50년 오류동에서 성나자로원을 창설하였다. 1951년 시흥에 20만평의 대지를 구입한 성나자로원은 그 곳에서 이전하면서 1955년에는 가톨릭 의대 부속 성나자로의원을 개원하였다. 이때부터 재가(在家)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이동진료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 그간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성 나자로마을은 수원교구가 분리, 독립된 이후인 1967년 수원교구로 이양되었다. 1975년 성당을 축성하였고, 1981년 설립 30주년을 맞아 피정의 집을 개설하였다. 현재 성 나자로 마을에는 나환자 정착촌을 비롯하여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病棟), 진료소, 성당, 교육관, 수녀원, 휴게실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971년 창간된 마을회보가 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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