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원] Latin America [관련] 해방신학

1492년 콜룸부스가 상륙한 이후 3세기 이상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던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지역을 이르는 말로, 라틴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 아래서 영국 문화권을 형성한 북아메리카에 대비하여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인종은 주로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Indio), 16~17세기 아프리카에서 이입한 니그로, 혼혈종인 메스티조 등이 주류를 이루고 백인들도 소수 존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복잡다단한 사회구조, 현저한 계급적인 대립, 식민지와 반식민지적인 수탈과 지배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발, 대토지 소유와 도시 · 지방간의 대립, 낮은 교육수준, 계속되는 쿠데타와 불안한 정정(政情) 등을 꼽을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본주의 경제모델에 따라 경제개발을 시도하였지만 선진국에 종속되어 있는 구조로부터의 해방 없는 개발이란 선진국에의 종속과 국내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는 교훈만을 얻은 채 경제개발은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네오 마르크시즘(Neo-Marxism)과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 대두되었다.

이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교된 시기는 대체로 콜룸부스의 상륙에서 잉카제국의 멸망(1531년)에 이르는 40여년간이다. 이들 지역에 전교를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카푸친회 등의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의 활발한 전교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는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독립전쟁이 일어나 현재 총 26개국에 달하는 독립국가가 탄생하였다. 이들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2차 대전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을 반영하여 독득한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을 탄생시켰다. 1967년 콜룸비아 메델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는 “이 세상에서의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연결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결의문을 발표하면서 해방신학을 교회 내에서 인정하였다. (⇒) 해방신학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라틴교부 [한] ~敎父 [라] Patres Latini Ecclesiae [영] Latin Fathers of the Church [관련] 교부

라틴 문화권에 속하는 교부들. 모두 39명으로서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340-397), 호교론자 아르노비오(Arnobius, ?~327),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354~430), 서방수도원제도의 창시자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6), 아를르의 대주교 성 체사리오(St. Caesarius, 470~542), 수덕(修德)에 관한 저술가이며 수도원장인 성 요한 카시아노(St. Joannes Cassianus, 360~435),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St. Celestinus I, ?~432), 교황 성 고르넬리오(St. Cornelius, ?~253),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St. Cyprianus, ?~258), 교황 성 다마소 1세(St. Damasus I, ?~384), 교황 성 디오니시오(St. Dionysius ?~268), 파비아의 주교 성 엔노디오(St. Ennodius, 473~521), 리용의 주교 성 에우케리오(St. Eucherius, ?~449), 뤼스프(Ruspe)의 주교 성 풀젠시오(St. Fulgentius, 468~533), 엘비라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392),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St. Gregorius Magnus, 540~604), 프와티에의 주교 성 힐라리오(St. Hilarius, 315~368), 교황 성 인노첸시오 1세(St. Innocentius I, ?~417), 리용의 주교 성 이레네오(St. Irenaeus, 130~200), 세빌랴의 대주교 성 이시도로(St. Isidorus, 560~636), 사제이며, 성서주석가, 불가타의 번역가 성 예로니모(St. Hieronimus, 343~420), 호교론자 락탄시오 피르미아노(Lactantius Firmianus, 240~320), 교황 성 대 레오(St. Leo Magnus, 390~461), 라틴 논쟁가 마리오 메르카토르(Marius Mercator, 5세기 초엽), 로마 수사학자 마리오 빅토리노(Marius Victorinus, 4세기), 호교론자 미누치오 펠릭스(Minucius Felix, 2-3세기), 이교자 노바시아노(Novatianus, 200~262), 밀레브의 주교 성 옵타토(St. Optatus, 4세기 말엽), 바르셀로나의 주교 성 파치아노(St. Pacianus, 4세기), 사제 성 팜필로(St. Pamphilus, 240~309), 놀라의 주교 성 바울리노(St. Paulinus, 353~431), 라벤나의 대주교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St. Petrus Chrysologus, 400~450), 아장(Agen)의 주교 성 페바디오(St. Phoebadius, ?~395), 신학자 아퀴타니아의 성 프로스페로(St. Preosperus Aquitainensis, 390~463), 그리스 신학의 라틴어 번역가 루피노(Rufinus, 345~410), 사제 살비아노(Salvianus, 400~480), 교황 성 시리치오(St. Siricius, 334~399), 라틴 신학의 창시자, 호교론자 테르툴리아노(Terullianus (160~223), 사제요 수도자 레랭의 성 빈첸시오(St. Vincentius Lerinsensis, ?~450). (⇒) 교부학, 교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라틴건축 [한] ~建築 [영] Latin architecture

이탈리아의 라틴민족 사이에서 발달되어, 라틴교회의 특징을 이룬 초기의 성당건축 양식을 말한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시대(306~337년)부터 시작되어 8세기경까지 계속되었다. 십자가형보다도 오히려 T자형 바실리카식의 간소한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로마 교외에 있는 성 바울로 성당만이 그 모양을 따 재현시키고 있을 뿐이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라테란조약 [한] ~條約 [라] Pactum Lateranense [영] Lateran Pacts

1929년 2월 11일 바티칸시의 라테란궁에서 조인된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조약과 재정적 협의 및 종교협약을 말한다. 1870년 이탈리아에 의해 교황령이 장악되자 교황들은 잇달아 그것을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항의 하였으나 이탈리아 정부 또한 한 치도 양보함이 없이 이에 팽팽히 맞섰다. 그러던 중 1922년, 교황 비오(Pius) 11세는 교황위에 오르자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표시했고, 때마침 파시즘의 승리로 부상한 무솔리니(Mussolini)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후 교회법을 개정시키려는 정부측의 움직임에 대해 교황은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협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천명하였으며, 이로써 교황 주재 하의 이탈리아와 교황청 사이의 회합이 1929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① 조약 : 전문(前文)과 27개 항목으로 구성. 바티칸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의 오랜 문제들에 대해 최종 해결책을 제시. 이탈리아는 바티칸시가 일정한 영토와 국민 및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임을 인정하였으며, 이로써 바티칸 교황청은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국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외교사절을 파견 · 접수하는 등 국제관계에서까지도 교황청이 스스로 절대 독립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하였으며, 108.7에이커의 이 작은 국가에 상수도 시설과 이탈리아 철도와의 연결점, 방송국 등을 설치하고, 외부와 전보 · 전화 · 우편시설을 연결시키는 혜택을 베풀기로 하는 등 이탈리아와 바티칸시 사이의 여러 가지 세부적 관계 사항들을 정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교황의 존엄은 신성불가침으로 언행에 있어서의 교황에 대한 모독은 국왕에 대한 것과 같은 비중으로 이탈리아 법에 의해 처벌받으며 교회의 주요 법인 조직체는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또한 성 요한 라테란 성전과 성 마리아 대성전과 성 바울로 성전 등의 주교좌 성당들과 로마 내의 다른 교회 및 건축물과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별장에 대한 교황청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반면 교황청은 로마를 수도로 한 사보이(Savoy) 왕조하의 이탈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양편은 모두 이전의 보호법을 폐기하였다.

② 재정적 타결 : 이탈리아 정부는 조약의 중요부분을 이루는 특별한 규약에 의해 교황령과 그 안의 소유물의 손실에 대하여 보상하기로 하였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보상금을 줄여서 현금 7억 5,000만 리라(lire)와 1억 리라에 상당하는 정부의 유통성 있는 채권의 5퍼센트로 책정하였다.

③ 종교협약 : 전문과 45개 항목으로 구성. 앞의 조약과 더불어 이탈리아에서의 종교와 가톨릭 교회의 위치를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교회는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이 정신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공적인 예배를 드리며 종교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신성한 로마시에서 그 성격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것도 약속하였다. 교황청은 가톨릭 세계와 자유로이 서신을 교환하고 어떤 언어로든 훈령을 출판할 수 있다. 교황청은 그 이름을 정부에 제출한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대주교와 주교를 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임명된 주교는 국가에 대해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성직은 이탈리아의 시민에게만 주어질 수 있으며 신부와 수도사는 병역과 배심원의 의무에서 면제된다. 이탈리아는 혼인성사에 공적 효력을 부여하며 공립 국민학교와 신부, 수사, 평신도에 의해 인가된 중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가톨릭 활동 보조단체와 같이 종교단체나 자선사업체들은 국가의 인가를 받는다. 그러나 수사나 성직자들의 정당 가입은 다시금 금지되었다.

전 과정을 통해 비오 11세는 시종일관 종교적인 견지에서 영토에 관한 교황권의 우월성을 주장한 데에 반하여 무솔리니의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법안은 이탈리아와 그 외의 국가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회합은 때때로 결렬될 뻔하였으나 조정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창건 이후 계속 이탈리아에 불명예가 되어 오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교황은 “이탈리아는 신에게 다시 돌아왔고 신도 이탈리아에게 되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이 조약의 결과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집권 당시에도 이 조약을 둘러싼 충돌이 종종 발생하였는데, 교황은 가톨릭 청년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이탈리아 청년들을 완전 장악하려는 파시스트의 저의를 간파한 바 있으며 1937년의 히틀러의 것을 모방한 인종법을 이 조약에 대한 위반으로 규탄하였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스트당과 왕국이 물러나고 1944년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에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기독교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의 지지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참고문헌] B. Mussolini, Gli accordi del Laterano, Roma 1929.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라테란대성전 [한] ~大聖殿 [라] Basilica Laterani [영] Lateran Basilica

로마의 5대 바실리카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건물이다.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St. Melchiades)에게 라테란궁전을 기증할 때 함께 세워 준 성당으로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Sylvester) 1세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교회가 되었다. 최초의 교회는 898년의 지진으로 붕괴되었고, 이를 재건한 교황 세르지오(Sergius) 3세에 의해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되었다. 1309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까지 모든 교황이 이곳에서 대관식과 착좌식을 했고 이곳에 묻혔다. 1123, 1139, 1179, 1215, 1512년에 각 공의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1308년 화재로 소성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그 뒤 교황 식스토(Sixtus) 5세와 후임 교황들이 폰타나(D. Fontana), 보로미니(F. Borromini) 등의 건축가들에게 위탁하여 건립한 것이다. 성당의 건축은 바로크양식으로 원주(圓柱)와 원주 사이의 벽에는 사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사도상 위에는 신구약 성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다시 그 위에는 예언자들의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이어진 천장에는 많은 교황들의 문장(紋章)과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개수(改修)된 후방(後方)에는 지상과 천국의 일치를 상징하는 그림이 13세기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중앙의 대제단(大祭壇)에는 성 바울로와 베드로의 머리 및 카타콤바에서 옮겨 온 많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고,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삼나무[杉木] 탁자가 보존되어 있다. 한 대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라테란궁전은 1843년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예술박물관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1929년 라테란조약도 이 궁전에서 체결되었다. 라테란대성당의 위치는 로마의 몬테 첼리오(Monte Celio)이며, 축성축일은 11월 9일이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