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후 [한] 金震厚

김진후(1738~1814). 순교자. 세례명 비오 성인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증조부(曾祖父).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살면서 입교 전에는 하급관직에 있으면서 미신을 믿고 속세의 재물과 권세를 탐내었다. 그러한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다. 어떠한 동기에서 입교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입교 후에는 천주의 진리를 깨달아 모든 허영을 물리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심하였다. 그가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을 1791년부터이다. 그 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전주 · 홍주 · 공주 등 여러 감옥에서 무수한 고문으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켜 왔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辛酉) 대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 유배되었다. 1805년 다시 잡혀 해미(海美) 감옥에 압송되었을 때에는,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끝내 배교치 않았다. 그러나 사형언도는 내려지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옥중생활을 하였는데, 옥중에서도 공공연하게 신앙을 지켜 그의 덕망과 고귀한 인품, 그리고 그의 굳은 신앙을 옥리들에게까지 감화를 주었다. 그는 1814년 10월 20일(음) 76세를 일기로 옥사 순교하였는데, 그 원인이 고문에서인지 병사 또는 아사(餓死)로 인한 것인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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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한] 金振聲

김진성(?~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청송에서 경주진영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냈고 경주에서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의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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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한] 金宗漢

김종한(?~1816).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본명은 한현(漢鉉). 김진후(金震厚)의 셋째 아들로 성녀 김데레사의 부친이며 김대건(金大建)신부의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충남 면천 솔뫼(현 唐津郡 午江面 松山里)에서 태어나 친척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부친 김진후가 박해로 인하여 다년간 옥중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동시,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경상도 안동(安東) 가까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17년 동안 숨어 살면서 오직 기도와 고신극기(苦身克己)로 덕행을 쌓으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을해(乙亥)박해가 일어나 1815년 4월 23일(음) 안동 포졸들에게 잡혀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수감되어 배교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 마침 배교하고 석방되는 김윤덕을 만나자 그의 잘못을 꾸짖어 다시 개심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수한 고문과 감언이설로 배교하기를 강요당했으나 그의 굳은 신앙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사형집행이 무기 연기되자, 그는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없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약 20개월을 옥중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형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여러 통의 편지를 쓴 귀중한 기록을 남겼는데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드디어 대구 감영에서 참수되어 영광의 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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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륜 [한] 金宗倫 [관련] 진목정

김종륜(?~1868). 순교자. 세례명 루가. 경주 김씨 계림군파 17대손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얼릴 적에 영세, 입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를 피해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駕項里]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언양을 거쳐 울산 죽령(竹嶺, 대나무고개)에 들어가 이양등(李陽登, 베드로)회장을 만났고 얼마 후 김해에서 온 허인백(許仁伯, 야고보)을 만났다. 이들 셋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경주땅 산내(현재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 있는 소래동 단수골이란 석굴(石窟)을 발견, 그 곳을 피난처로 삼고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1868년 5월 ‘덕산묘지 도굴사건’의 여파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셋은 이 때 경주아문의 포졸들에게 잡혔다. 경주아문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8월 울산 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틀 후인 8월 14일(음 7월 28일) 장대벌 형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조애에 의해 수습되어 사형장 근처의 다리밑에 가매장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3인의 유해는 월성군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되었다. 1932년 5월 29일 대구 감천리 공원묘지로 이장되었고, 1962년 10월 25일 석곽에 모셔져 공원묘지 산 위에 있는 성모석상 앞으로 옮겨졌으며 1974년 10월초 다시 신천동 복자성당 구내로 옮겨졌다. (⇒) 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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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교 [한] 金宗敎

김종교(1753~1801). 순교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일명 치회. 의원(醫員) 집안에서 출생하여 1784년 김범우(金範禹)의 권유로 천주교 서적을 빌어 읽고 18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영세, 이 해 을묘(乙卯)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 후 배교한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독실한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다시 체포되어 포청에서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0월 4일(음 8월 27일)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하여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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