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준 [한] 金濟俊

김제준(1796~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이냐시오. 일명 시명.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의 아버지.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祖父) 김진후(金震厚)와 백부(伯父)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던 중 서양신부들이 입국하자 모방(Maubant, 羅)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15세 된 큰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8월 사위 곽(郭)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내보낸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 한때 배교했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지켜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 분도출판사, 1979 / 柳洪烈,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出版社,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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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본당 [한] 金堤本堂

1920년에 수류(水流)본당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가 사목 목표로 부인 전도회장의 필요를 느껴 정읍군 사외면 구장리 공소회장 김정엽(金正燁)의 부인인 김 아가다를 선임, 전교활동을 개시하여, 얼마 뒤 금산리(金山里) 공소를 신축하였다. 1930년에 와서 200여명의 예비자 영세를 계기로 본당 승격의 기틀이 마련됨에 따라 당시 수류 본당주임인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주선하여 1931년 김제에다 성당을 세워 15년간의 공소시대를 청산하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주보로 하여 1935년 12월 8일 김제본당으로 승격 발족하여 오늘에는 요촌(堯村) 등 5개 구역을 관장하는 전주교구 관하의 유력한 본당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대충 역대 주임신부별로 연혁을 살피자면, 1대(1935~1938년) 이상화 신부가 주춧돌을 놓은 뒤, 5대(1948~1950년)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신부가 1948년 요촌리에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51년 7대(1951~1955년) 허일록(許日錄, 다두) 신부가 대지 4,758평을 매입했는가 하면, 8대(1944~1958년)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는 본당 124평, 사제관 2층의 신축과 더불어 용지, 백자동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어 9대(1958~1960년)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신부 때부터 19대(1980~현재)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 신부 때까지 계속 공소 설립사업을 추진하여 소속 공소수는 8개소로 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이미 매입한 김제읍 신풍리 163의 1 소재 대지 833평 위에다 건평 210평 규모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성당 건립을 착공한 바도 있다.

예로부터 이 지대야말로 우리나라 곡창(穀倉)으로 불리는 만경(萬頃)들에 위치하여, 고찰 금산사(金山寺) 주위에는 불교와 유사불교가 뿌리를 박고는 있지만, 김제본당의 전교활동 상황은 매우 전망이 밝다. 김제읍 요촌리 172번지 소재 대지 4,758평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김제본당은 주보로 ‘성모성심’을 모시고, 1984년 현재 신자수 3,088명에 8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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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득 [한] 金丁得

김정득(?~1801). 신유(辛酉)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충청도 공주(公州) 출신.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무성산으로 피신하여 성물, 성서 등을 감추었으나 밀고자에 의해 거처가 알려져 잡혀서 홍주(洪州)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 곳에서 다시 청주(淸州)로 이송되어 여러 달 혹형을 받았으나 끝내 배교치 않으므로 다시 서울로 이송되어 1801년 8월 25일(음 7월 17일) 대흥(大興)고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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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한] 金在德

김재덕(1920~1988). 주교. 제5대 전주(全州)교구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24번지에서 출생. 1935년 3월 전북 진안 마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祖)[소신학교, 성신중 · 고교의 전신]에 진학, 1941년 동성상업학교 을조를 졸업했고, 이어 성 유스티노 대신학교와 덕원 성 분도 대신학교를 거쳐 1947년 10월 28일 성신대학(聖神大學, 가톨릭大學의 전신)을 졸업함과 동시에 전주교구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전주 대동본당 · 전북 화산본당 · 김제본당 · 군산본당 · 전주 중앙본당 등의 주임신부를 역임하고 1961년 전주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이듬해 당시 전주교구장 한공렬(韓공烈) 주교의 수행원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고, 1996년 전북 이리본당 주임신부, 1969년 전주 전동본당 주임신부, 1972년 전주교구 부교구장 겸 상서국장을 거쳐 1973년 2월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3월 19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후 주교회의 상임위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총재를 역임하는 한편 1975년 제2차 극동주교회의에 참석하고, 1978년과 1980년 2차에 걸쳐 로마교황청을 방문하고 유럽을 순방하였다. 1981년 4월 10일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은퇴하여 현재 전주시내에 머무르고 있다.

[참고 : 김재덕 주교는 1988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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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복 [한] 金長福

김장복(1797~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01년 아버지 김흥금(金興金)과 함께 충청도 연풍(延豊)에서 입교했고 입교 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진보(眞寶)로 피신해 살았다. 1815년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아버지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으나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의 형벌과 굶주림으로 이해 10월(음) 아버지와 함께 옥사(獄死)하였다. 동생 작단(作丹)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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