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 [한] 自然神學 [라] theologia naturalis [영] natural theology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탐구하려는 신학의 한 분야로, 이를 통해 신의 계시가 반이성적(反理性的)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자연신학을 체계화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서 ≪호교대전≫(護敎大全, Summa contra gentiles, 1258~1261)을 통해서 이성적인 진리와 도덕적인 진리, 신비적인 계시를 차례로 예시하고 이것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한 뒤 “선비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성에 반(反)하는 것도 아님”을 명백히 하고서 “은총은 이성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완성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밝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내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로마 1:19-20)라고 말한 성서의 구절을 전거(典據)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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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 [한] 自然法 [라] ius naturale [영] natural law [독] Naturrecht [프] droit naturel

일반적으로 실정법(實定法)을 초월하여 영구불변적으로 존재하는 법이라고 정의되나 그 개념과 인식가능성에 대하여 신학 · 철학 · 법학 등에서 이론적으로 분분한 논의가 있다. 자연법의 특성으로서 크게 그 보편타당성, 영구불변성, 역사성, 인식가능성 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자연법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독일의 법학자 에릭 볼프(Erik Wolf) 는 그의 저서 ≪자연법론의 문제≫(Das Problem der Naturrechtslehre)에서 ‘자연’(Natur)이란 말이 갖는 의미가 12가지, ‘법’(Recht)이란 말이 갖는 의미가 10가지나 되어 그것을 복합하면 수만은 자연법의 개념이 성립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렇지만 개념은 다의적(多義的)이지만 그 기능은 일의적(一義的)인데, 그것은 실정법에 대하여 항상 비판적으로 그 불완전성을 깨우쳐 주는 ‘등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연법을 부정하는 한스 켈젠(Hans Kelsen)은 자연법이란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으로 오히려 실정법 질서를 변호해 주고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더 많이 해왔다고 주장한다.

1. 가톨릭신학에서의 자연법: 가톨릭 신학에서 자연법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신학자와 윤리학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자연법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① 성서적 증명 : 복음서는 자연법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하였고, 로마서 1장 8-32절과 2장 14-15절에는 마음에 쓰여진 법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여기서 계시(啓示)된 법을 갖고 있지 않는 자는 자연의 법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② 교회전승과 교도상 증명: 일찍부터 교부(敎父)들은 자연법이란 마음에 내재(內在)하는 것, 타고 나는 것, 삽입된 것, 마음에 쓰여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성 토마스와 스콜라학파에서도 일반적으로 자연법의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교회의 문헌중에도 최근까지 자연법이란 표현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Denz. 160:1198, 1292, 1767). 교황 비오 12세는 도덕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법을 상기시켰고, 요한 23세에게서도 반영되었다. ③ 이성(理性)에서의 증명 :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을 자연적 최후 목적으로 삼고, “선(善)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을 자명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근세의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 Humanisten)들도 인정하였고, 오늘날까지 윤리학의 기본명제로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자연법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제1차적 자연법(primares Naturrecht)과 제2차적 자연법(sekundares Naturrecht)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제1차적 혹은 보편적 원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라는 원리인데. 이 원리의 내용 역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존재의 질서를 보존하라”, “너의 의무를 다하라”, “너의 존재 목적에 도달하라”는 등의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 설명된다. 제2차적 자연법은 보편적 제1차적 자연법에 적용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는데, 그것은 무엇이 구체적으로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지시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 ‘성생활(性生活)의 한계를 지켜라’ 등의 규범이 생성된다. 학자에 따라서는 제3차적 자연법으로, 보다 또 보편적인 구체적 윤리규범을 들어 설명하는 이도 있다. 이것은 직접 알 수 있는 자연법이 아니고 보다 심사숙고해야 할 원리로써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성(不可解性), 자살, 격투, 혼전성교(婚前性交)의 금지 등보다 더 현실상과의 관계성속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요청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2. 자연법론의 전개 : 자연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연법이 모든 실정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자연법 사상내지 자연법론이라고 부른다. 자연법론은 크게 전통적 자연법론과 근대적 자연법론, 그리고 현대의 신자연법론(新自然法論)으로 나누인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자연법론은 고대의 그리스철학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론화되었다. 그것은 주로 삼라만상의 자연(physis)에서부터 불변하는 법clr과 진리를 찾으려는 내용이었다. 그 뒤 스토아학파를 거쳐 중세 스콜라철학에 이르러 그 이론체계가 완성되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자연법론의 대변자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神) 중심적 자연법의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결부시켜 정치(精緻)한 이론체계를 구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과 이론은 토마스주의(Thomismus)라고 물러 현대의 철학과 법학에까지 연면히 계승되어 오고 있다. 17세기 이래 대두한 개인주의, 합리주의,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us)의 사상은 전통적 중세적 자연법사상에 크게 도전하였다. 그것은 자연중심적, 신(神)중심적 자연법의 관념과 유대를 끊고 인간의 이성과 사변(思辨)의 기초위에 새로운 자연법론을 수립하였다. 이것을 근대적 자연법론 또는 합리주의적 자연법론이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H. Grotius)에서 시작하여 독일의 푸펜도르프(S. Pufendorf), 라이프니츠(G. Leibniz), 토마지우스(C. Thomasius), 볼프(C. Wolf), 영국의 홉즈(T. Hobbes)와 로크(J. Locke), 프랑스의 몽테스키외(C. Momtesquieu), 루소(J.J. Rousseau)와 백과전서학파(百科全書學派)의 사상들이 근세의 자연법론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법론은 ‘철학을 좋아하는’ 독일의 관념철학(觀念哲學. Idealismus)에서는 칸트(I. Kant), 피히테(J. Fichte), 헤겔(F. Hegel) 등에 의해 독특한 자연법사상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근세의 자연법론은 프랑스의 대혁명에서 보듯이 구제도에 대하여 혁명적인 비판의 이론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각국에 새로운 법전(法典) 편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실로 17~18세기를 자연법론의 시대라고 부를 만한 의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족(自足)하다고 믿었던 이성, 사변의 구체적 판단은 복잡다양한 자연법이론을 전개하여 분열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에 근대 자연법론을 논박하여 일어난 것이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 Rechtspositivismus)의 사상이다. 법실증주의는 인간이 만드는 제정법(制定法)만이 법이라고 보고, 자연법과 같은 관념은 허구와 이데올로기 내지 도덕이라고 배척한다. 이러한 사고는 19세기에 발달한 자연과학을 배경으로 한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기인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대두한 이 실증법학도 1세기 동안 법학계를 풍미하였지만 19세기말부터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20세기에 들어서 다시 자연법사상이 논의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자연법의 재생(再生)’(Renaissance des Naturrechts)의 현상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자연법은 전통적 중세적 자연법과는 달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하여 신자연법론(新自然法論)이라고 부르는데, 그중 가장 큰 흐름은 토마스주의를 재생시킨 신토마스주의(Neo-Thomismus)의 진전이었다. 이들은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양차(兩次) 대전과 파시즘, 나치즘 등의 전체주의가 자연법을 부정하는 인간의 오만된 실증주의적 사고에 기인한다고 비판하고 “자연법은 자기를 매장하는 자를 매장시키고 만다”(E. Gilson)고 경고하였다. 독일에서는 칸트주의와 상대주의의 입장에 서 있던 라드브루흐(G. Radbruch)같은 법철학자도 나치즘 경험 이후 자연법론으로 기울어지고, 벨첼(H. Welzel), 코잉(H. Coing), 페히너(E. Fechner), 마이호퍼(W. Maihofer), 카우프만(A. Kaufmann), 홀러바하(A. Hollerbach) 같은 학자들이 자연법의 법철학적 이론정립에 활기찬 노력을 경주하였다.

자연법의 문제는 법학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 자연법의 영구회귀(永久回歸, ewige Wiederkehr des Naturrechts)의 현대적 흐름 속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네오 토미즘의 입장에 서는 학자들로 프랑스의 마리탱(J. Maritain), 질송(E. Gilson), 르퓌르(Le Fur), 르나르(G. Renard), 샤르몽(Charmont), 제니(F. Geny), 독일의 카트라인(Cathrein), 롬멘(H. Rommen), 메스너(J. Messner), 페트라셰크(Petrasch다), 횔셔(Holscher), 실링(O. Schlling), 벨기에의 다뱅(J. Dabin), 르클레르크(J. Leclercq), 이탈리아의 베키오(Del Vecchio), 그라네리스(Graneris), 당트레브(A.P. d’Entreves), 영미(英美)의 풀러(L. Fuller), 홀(J. Hall), 와일드(J. Wild)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자연법론자로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일본의 다나까(田中耕太郞), 한국의 김홍섭(金洪燮) 등의 가톨릭 법률가들을 들 수 있다. 자연법 연구지로는 미국 노트르담 법대(Notre Dame Law School)에서 <자연법평론>(Natural Law Forum)지를, 일본의 자연법연구회에서 <自然法硏究>지를 연보(年報)로 발간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자연법의 문제를 크게 중요시하지 않거나 외면해 왔다. 거기에서는 자연법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이 아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절대 타락하였기 때문에 오직 신앙(sola fide)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계시신학(啓示神學)에 근거하여 자연법과 자연신학을 거부하여 왔다. 그들은 새 인간, 즉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의 법칙만이 인간공동체의 본질이며 그 이외의 어떠한 이론이나 규준도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계시실증주의(啓示實證主義), 사랑주의, 신앙주의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지적한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단조화(單調化)와 윤리학의 불모화(不毛化)를 초래하였고, 따라서 세속적 사회질서와 학문과의 단절과 무력(無力)을 야기하였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2차 대전 후 뜻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자연법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법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하여는 신중을 가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가톨릭 신학에서 논의하는 자연법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들과는 브룬너(E. Brunner), 헤켈(J. Heckel), 불프(Erik Wolf), 돔브와(H. Dombois), 매쿼리(J. Macquarrie), 램지(P. Ramsey) 등을 들 수 있다.

세속적 사회사상가들은 자연법이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고정된 자연과학과 윤리학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유치한 관념이라고 비판하였다. 폭발적인 발달을 이룩한 현대과학과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의해 그칠 줄 모르게 발전한 현대철학은 때때로 가톨리시즘의 자연법적 윤리관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였다. 사회 안에서 고독해지고 격화된 인간행동의 원천과 동기는 맹목적 충동(Libido)에서부터 나온다는 프로이드(S. Freud)와 같은 인간관도 자연법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자연법의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규범은 또한 인도적인 자유주의자나 현상유지를 거부하는 사회개혁론자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탱이 표현한 바와 같이, “자연법사상은 단순히 어떤 학파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사상 및 고전적 사상의 유산이다. 자연법은 한 마디로 ‘쓰여지지 않는 법’(unwritten law)이며, 실정법 위에 존재하며 인간의 본질에 기초한 영원한 법이다. 또한 자연법은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할 법이며, 제정된 법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자연법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3. 한국의 자연법사상 : 한국인은 자연법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자연법칙에 가까운 사고를 가졌다. 사회현상은 자연현상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따라서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가 온다고 생각하였다. 사형(死刑)은 자연이 쇠잔해가는 가을과 겨울에 집행하였고, 형관(刑官)을 추관(秋官)이라 하였다. 이러한 미분화적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사상에 기초하여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경위’(涇渭 혹은 經緯) 혹은 ‘하늘’에 대한 외경(畏敬)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고유한 초보적 자연법의식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와 실정법질서에 의하여 억압된 채 자유롭게 전개되지 못하고 근대에까지 이르렀다. 도리(道理)에 맞고 민신민지(民信民志)에 따르는 양법미의(良法美意)가 이념적으로는 추구되었으나, 정치적 불안정과 외세의 침입으로 법의 권위와 존엄을 계속적으로 발전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리스도교적 자연법사상은 18세기 후반부터 가톨릭교도에 의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자연법사상은 ‘양심법’(良心法) 혹은 ‘마음법’ 등의 용어로 초기 가톨릭 교리서들과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르쳐졌다. 가톨릭 신앙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리려는 조선왕조의 실정법체계에 위배되어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가톨릭 교도들은 국왕의 권력보다도 신의 명령의 우위를 증거하였고, 정하상(丁夏祥) 같은 이는 국가질서에 해로움을 주지 않는 교회의 질서의 독립성과 동등성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톨릭 교우들은 자연법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서양에서처럼 자연법론을 이론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하였다. 이론적인 소개는 가톨릭신학을 공부한 성직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컨대 1950년대에 한공렬(韓公烈) 주교가 <가톨릭시보>를 통하여 자연법을 소개하고, 이태재(李太載) 박사가 ≪자연법개론≫(1961)을 저술하고, 마리탱의 저서 ≪자연법과 인권≫(1958)이 번역 출판된 것들을 들 수 있다. 자연법의 개념은 현대 한국의 사회적 질서의 문란과 독재적 정치에 대항하여 교회가 발언할 때 자주 인용되었다. 1970년대에 제정된 모자보건법(母子保健法)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자연법에 근거하여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였고, 유신체제(維新體制) 아래서 한국 교회와 정의구현사제단(正義俱現司祭團)에서는 민주주의와 사회 · 경제적 평등, 언론의 자유들을 자연법에 근거하여 주장하였다. (崔鍾庫)

[참고문헌] <가톨릭 관계> J. Fuchs, Lex Naturae, 1955 / J. Messner, Naturrecht, 1966(5) / M. Muller, Art. Naturrecht, Staatslexikon 1960(3) / O. Lottin, Le droit naturel chez S. Thomas et ses predecesseurs, 1930 / K. Demmer, Jus caritatis, 1961 / A.M. Knoll, Katholische Kirche und scholastisches Naturrecht, 1962 / E. Haag, Die Entwicklung der neueren katholischen Naturrechtslehre, 1962 / U. Kuhn, Via caritatis, 1965 / F. Bockle(ed), Das Naturrecht im Disput, 1966 / F. Bockle, E.W. Bockenforde(ed), Naturrecht in der Kritik, 1973. <프로테스탄트 관계> E. Brunner, Gerechtiglkeit 1943(全澤鳧역, 正義와 社會秩序) / J. Heckel, Lex charitatis, 1953 / L. Strauss, Naturrecht und Geschichte, 1956 / Ernst Wolf, Dieevangelische Stellungnahme zum Naturrechtsproblem, in: Staatslexikon V, S. 965-971, 1960(6) / H. Welzel, Naturrecht und materiale Gerechtigkeit, 1962(4) / A. Kaufmann(ed), Die ontologische Begrundung des Rechts, 1965 / Erik Wolf, Das Problem der Naturrechtslehre, 1964(3) / P. Althaus, Die Ethik M. Luthers, 1965 / K. Peschke, Naturrecht in der Kontroverse, 1967 / H.D. Schalauske, Naturrechtsdiskussion in Deutschland, 1968 / W. Trillhaas, Ethik, 1970(3) / H. Thielicke, theologische Ethik, I, 1972(5), II, 1966(2), III 1968(a) / W. Maihofer(ed), Naturrecht oder Rechtspositivismus, 1972(2) / Th. Herr. Zur Frage nachdem Natvurecht im deutschen Protestantismus der Gegenwart, 1972. <국내문헌> 李太載, 自然法槪論, 法文社, 1962 /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김윤국 역, 교회와 인권, 분도출판사, 1976 / 마리탱 저, 한용희 역, 인간과 국가, 가톨릭출판사, 1956 / 마리탱 저, 김창수 역, 자연법과 인권, 갑진출판사, 1958 / 마리탱 저, 장광수 역, 正意, 自然法과 人權, 博英社, 1983 / 崔鍾庫, 法과 宗敎와 人間, 三美社, 1981 / 崔鍾庫, 國歌와 宗敎, 現代思想史, 1931 / 兪鳳俊, 1978 / 李太載, 自然法과 實定法과의 關係, 神學展望, 39, 1977 / 李太載, 韓國法學과 自然法思想, 神學展望, 54,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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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은총 [한] 自然∼恩寵 [라] natura et gratia [영] nature and grace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나온 본성으로서의 자연과 하느님이 인간에게 대가없이 그저 주는 은총과의 관계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논제의 하나이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가 지배하는 ‘자연의 왕국’(regnum naturae)에서 ‘자연의 빛’(lumen naturae)인 이성으로서 살아가는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연상태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초자연계(超自然界)로 불러들인다. 초자연계로 들어가기 위해 마련된 초자연적인 종교의 세계가 바로 ‘은총의 왕국’(regnum gratiae)이다. 이 은총의 왕국에서는 이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은총의 빛’인 계시로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그가 지닌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발휘하여도 초자연계에 도달할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져야 자연적인 인간은 비로소 영원의 생명을 얻는 초자연계로 들어가 구원을 받게 된다. 자연이란 초자연계로 들어가 구원을 받게 된다. 자연이란 초자연계에 들어가기 위한 ‘은총의 왕국’의 전단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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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한] 自然 [라] natura [영] nature [관련] 환경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주만물, 즉 자연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을 태우고 복종시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세상 만물 즉 자연이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이것을 현명하게 이용하며 더 큰 이익을 위하여 노동으로 완성할 사명이 인간에게 맡겨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연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발전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누구든지 필요한 것을 땅에서 찾을 권리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께서 땅과 그 안에 포함한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하시었다. 따라서 창조된 모든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주 지배의 원리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과학적 정신은 과거와는 다른 문화형태의 사고방식을 낳아 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자연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우주정복을 시도하게끔 되었다. 인간의 지성은 시간에 대해서까지 그 지배권을 확대시켰다. 역사지식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기술과 계획혁신의 가능성은 과학지식의 종합, 홍보의 집단성과 동시성, 완전 상호의존성을 강요하는 이른바 ‘경제세계’의 출현에 기인되어 있다. 이제 사람들은 생명유지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 물과 같은 천연자원뿐 아니라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포용하는, 작고 불안한 생명권이 무한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이야말로 온 인류의 유일한 공유재산으로 보호받고 보존되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 지배와 생산 증가를 위한 계획도 어느 것이나 다 결국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계획이란 불평등을 감소시키고 차별을 제거하며,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 누구나 자기의 물질적 복지를 도모하고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며 영신기능을 계발할 수 있게 한다. 진보는 사회적 향상과 경제적 발전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공동재화가 평등하게 분배되도록 증산을 꾀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또 대자연을 개발하여 인간이 살기에 보다 적합하도록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만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진보에 노력하는 사람들은 먼저 거기에 무슨 위험이 있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과대평가될 내일의 기술주의(테크너크래시) 즉 기술의 횡포가 가져올 해악(害惡)은 과거의 자본주의가 갖다 준 해악에 못지않을 것이다. 경제와 기술이 인간에게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의도 없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신의 행동을 명령하고 그 행동의 가치를 판단하며 스스로의 성장을 추진해 나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가 부여하신 본성에 알맞도록 자유로이 본성에 알맞도록 자유로이 본성의 능력과 요구를 받아 계발해야 할 것이다. 자연 정복은 무모한 도시비대와 공장들의 지나친 팽창을 동반한다. 기술의 탐구와 자연의 변형(變形)에 바탕을 둔 공업의 기계화 작업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무한대의 생산을 꾀하게 된다. 어떤 기업체는 날로 발전하며 서로 제휴하는가 하면, 다른 기업체는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시킨다. 직업적 내지 지역적 실업현상, 근로자들의 직업 전환과 이동, 기술공들의 계획적 적응, 여러 생산분야의 불균형 등을 초래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 수요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치성의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많은 소득을 성취하고서도 자기활동의 성과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면서도 자기가 만들어낸 생산품의 노예가 되고 있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서만, 즉 인간의 선과 가치를 캐냄으로써만 참되고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이 언급될 때마다 자연과 문화는 밀접하게 연결된다. 문화란, 넓은 의미로는 인간이 정신과 육체를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용하는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간은 지식과 노동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고 노력하고, 가정과 시민사이에 있어서 관습과 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며 마침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위대적 정신적 경험과 소망을 그 작품 속에 표현하고 전달하며 보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발전과 더 나아가서 전인류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자연의 이용, 노동, 자기표현, 종교의 실존과 관습의 형성, 입법과 법제도의 설립, 학문과 예술의 발전, 미의 발굴 등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공동조건과 생활수단 및 서로 다른 조직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이같이 물려받은 제도에서 각 인간공동체와 고유한 전통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 특정 환경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각 민족과 시대의 사람들이 속하게 되며 거기서 문화발전에 필요한 여러 재화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의 생활을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노력해 왔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 지배권을 거의 자연계 전체에 확장했고 또 계속 확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여러 가지 교류 수단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가족은 전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때 초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던 많은 혜택을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전인류에 퍼져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인간들에게는 인간 활동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개인적 내지 사회적 노력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위탁받아 보존하며 거기서 종교적 내지 윤리적 분야의 여러 원리를 찾아내고 있으므로 개개의 문제에 언제나 즉각적인 해답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근에 인류가 걷기 시작한 행로를 비추어 주기 위해서 계시의 빛을 모든 사람의 경험에 결부시키고 있다. 인간의 시계(視界)는 스스로 선택한 환상에 적응되지만 다른 또 하나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뜻밖에 극적으로 따라오는 인간활동의 결과인 것이다. 오늘날 사라들은 이 사실을 갑자기 의식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연을 불법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할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 스스로가 도리어 이런 타락의 희생물이 될 위협도 없지 않음을 느끼게 외었다. 인간은 자연의 타락과 폐물, 새로운 질병과 전면적 파괴력 같은 물질적 환경이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인간사회의 체계마저도 이제 인간이 조절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감당할 수도 없는 내일의 생활 조건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것은 전인류 가족에 관계되는 광범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 교인은 이 같은 새로운 전망에 관심을 모으고, 이제 공동운명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

오늘날 부강한 국가들의 천연자원과 에너지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 대량소비의 결과로 끔찍한 폐기물이 대기와 공해를 더럽히고 있으므로 지상 생명 유지에 필수 요소인 공기와 물을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 같은 대량소비와 오염현상을 그대로 증대되게 방치한다면 공해는 전인류에 미치게 될 것이다. 1971년 스톡홀름에서는 제1회 인간 환경문제 회의가 개최되어 공해문제를 다루었다. 선진국들의 물질적 욕구가 다른 국가들을 빈곤에 떨어뜨리고 혹은 지구상의 생명체를 전멸시킬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할 수도 있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선진국들이 요구되는 물질을 증가시키려는 권리를 과연 어느 정도 주장할 것인지는 예측을 불허한다. 이미 부유해진 나라들은 대량소비를 억제하고 보다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인류의 공동 유산인 물질과 생명을 인류 전체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누려야 할 절대적 정의의 요청에 따라 이 유산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 개발과 노동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때로는 노동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노동을 하느님께서 명하시고 축복하긴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창조사업을 완성하는 데에 창조주와 협력해야 하며 자기 안에 새겨진 정신적 모상을 이제는 땅에 되새겨 주어야 할 것이다. 지력과 상상력과 감수성을 인간에게 부여하긴 하느님께서는 이로써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할 수단과 방법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예술가, 기술자, 고용주, 노동자, 농부 할 것 없이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의미에서 창조를 계속하는 셈이다. 인간의 노력에 저항하는 물질을 접할 때 그 안에 자신의 모상을 새겨 주며 자신 안에서는 인내와 재능과 연구심을 길러낸다. 또한 여럿이 함께 일함으로써 희망과 고통, 소망과 기쁨을 서로 나누게 되며 따라서 뜻이 합쳐지고 정신이 가까워지며 마음이 서로 결합된다. 사람들이 함께 일함으로써 서로 형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환경 (韓庸熙)

[참고문헌]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회칙, 1967 /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부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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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미사 [한] 子時∼

가톨릭 교회에서 대축일 미사 중 자시 즉, 밤 12시에 드리는 미사. 자정미라하고도 한다. 예수 성탄 대축일의 세 대의 미사 중 밤중미사와 부활 성야제의 밤중 미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밖에도 지역교회에서, 필요한 몇몇 경우에 행해지기도 하는데 12월 31일의 송년미사를 자시미사로 드리는 것이 그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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