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자전≫(韓佛字典)에 따르면, 서교란 ‘성문법’, 특히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모세 이전의 족장시대까지 히브리민족들에게 구전(口傳)되어 오던 규율을 성문화하였다는 의미에서 모세율법을 서교라고 번역한 것이다. (⇒) 율법
서교1 [한] 西敎 [관련] 서학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東洋)에서 그리스도교를 지칭했던 단어. 서양(西洋)에서 전래된 종교(宗敎)라는 뜻으로 주로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지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가 17- 18세기에 실학자(實學者)들에게 학문 연구대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서교라는 말보다는 서학(西學)으로 통칭되었고 또 천주교 박해자들에 의해 사학(邪學)으로도 불렸다. (⇒) 서학
서광계 [한] 徐光啓
徐光啓(1562-1633).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신, 학자. 천주교인. 세례명 바오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현호(玄扈). 상해(上海)에서 출생. 이지조(李之藻, 1565-1630), 양정균(楊廷筠, 1577-1627) 등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支柱)로 추앙받는다. 1597년 향시(鄕試)에 급제한 후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1596년 예수회 선교사 카타네오(Lazarius Cattaneo, 중국명 敦居靜, 1560-1640)를 만나 최초로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1599년 남경(南京)에서 활동하던 리치(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를 방문,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이후 계속 리치와 친분을 맺었다. 1603년 로카(Joannes de Rocha, 중국명 羅如望, 1566- 1623)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상해로 돌아가 유명한 서가회(徐家匯) 교회를 창설, 전교에 힘쓰는 한편 서구의 천문 · 역산 · 지리 등에 관심을 갖고 이들 서적의 한역(漢譯)사업에 착수,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한역하고 이어 판토하(Didace de Pantoja, 중국명 龐迪我, 1571-1618)를 도와 ≪칠극≫(七克)을 간행하였다. 1604년 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올랐으며 1616년 자신이 천주교신자임을 규탄하는 상소가 빈번해지자 호교론적인 상소 <변학장소>(辯學章소)를 올려 무마했으나 1621년 위충현(魏忠賢) 일파에게 밀려나 서학연구에 몰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628 숭정제(崇禎帝)에게 등용되어 예부우시랑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예부좌시랑으로 승진, 이어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1629년 숭정제에게 구역법(舊曆法)을 폐지하고 신역법(新曆法)인 서양역법의 채택을 강력히 주장, 역법개정사업의 책임자가 되어 이지조, 롱고바르디(Nicolaus Longobardi, 중국명 龍華民, 1559-1654), 테렌츠(Joannes Terrenz, 중국명 鄧玉函, 1576-1630), 샬(Adam Schall von Bell, 중국명 湯若望, 1591-1666), 로(Jacobus Rho, 중국명 羅雅各, 1593-1638) 등과 함께 1631년 1차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완성하여 그 공로로 1632년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겸하게 되었고 이어 태자(太子)의 스승인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 1633년 선종하였다.
서광계는 이지조, 양정균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지주로 불릴 만큼 중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서양 선교사들을 도와 한역서학서의 저술과 간행에 헌신한 것은 물론, 스스로도 ≪벽망≫(闢妄)을 비롯한 많은 서학서를 번역하였다. 그뿐 아니라 전교에도 힘써 상해에 교회를 설립했고, 또 1620년 삼비아시(Francis Sambiasi, 중국명 畢方濟, 1582-1649)와 함께 조선전교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만주족의 위협으로 실패하였다. 시호는 문정(文定).
[참고문헌] 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香港公敎眞理學會, 香港 1670.
서강대학교 [한] 西江大學校
예수회에서 설립한 종합대학교. 소재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1948년 한국 가톨릭 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Pius) 12세의 윤허로 대학 설립이 계획되어, 1954년 예수회원인 독일의 테오도로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박사가 서울에서 창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5년 예수회 위스컨신관구에 그 창립사업이 이관됨으로써 비로소 창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1956년에 재단법인 한국 예수회가 인가를 받아 마포구 신수동에 대지를 구입하고, 1960년에 대학설립 인가를 받음으로써, 동년 4월에 개교를 보게 되었다. 초대 학장으로는 킬로런(Kenneth E. Killoren) 신부가 취임하였고, 영어영문학과 · 사학과 · 철학과 · 수학과 · 물리학과 · 경제학과의 6개 학과를 설치한 단과대학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여 불과 10년 후인 1970년에는 명실상부한 종합대학교로 개편되어 초대 총장에 데일리(John P. Daly) 신부가 취임하였다.
가톨릭 세계관을 기초로 설립된 동 대학교는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고 학문의 전수와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인간형성에 노력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공동체가 됨을 모토로 학술연마와 인격도야에 정진함으로써, 오늘날에는 문과대학 · 이공대학 · 경상대학의 3개 대학과, 대학원 · 경영대학원의 2개 대학원 및 부속기관으로는 과학기술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 경제경영연구소, 산업문제연구소, 신학연구소등 15개 기관을 갖춘 전국 유수의 명문교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1964년 2월에 제1회 졸업생 62명을 배출한 이래 제18회(1980학년도)까지 총 4,883명의 졸업생이 사회 각계에 진출하여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으나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어, 동 대학의 질적인 면에서의 평가는 점차 높아가고 있다.
샹탈 [원] Chantal, Jeanne Francoise
Chantal, Jeanne Francoise(1572-1641). 성녀. 프랑스의 가톨릭 신비주의자. 방문 수도회(여자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축일은 8월 21일에서 12월 12일로 바뀌었다. 디종의 프레미오가(家)에 태어나 1592년 샹탈 남작과 결혼했으나, 1601년 남편이 급사(急死)한 뒤 몽트롱성(城)에서 기도와 자선과 자녀 양육에 전심하였다. 1604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알게 되어 그의 영적 지도를 받고, 1610년 프란치스코의 안(案)에 따라 오트사브와현(縣)의 아느시에서 ‘성모방문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이것은 주로 과부, 과거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에 견디지 못하는 여성을 위한 수도회로, 프란치스카는 수도원장으로서 신비적인 관생생활과 실천적 효과가 많은 활동을 일치시켰다. 1622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사망하자, 그의 설교집 및 그와의 왕복서한집을 간행, 덕행생활에 관한 문서의 공표로 인해 그의 시복(諡福)을 위한 조사에서 제일의 증자(證者)가 되었다. 1751년에 시복, 1767년에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