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일기 [한] 己亥日記

현석문(玄錫文)이 지은 1839년 기해년(己亥年) 박해 때의 순교자전(殉敎者傳).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교 자신도 조만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정하상(丁夏祥), 현석문 등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과연 주교는 그해 7월 5일에 잡히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에는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으므로, 현석문은 주교의 뜻을 받들어, 관헌의 눈을 피해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순교자의 거룩한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3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기해일기》를 완성하였다. 그 후 한때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신부는 기해년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를 보충하였고, 페레올(Ferreol, 高) 주교도 입국하자마자 현석문과 함께 이 《기해일기》를 재검토하여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순교자의 자료를 열심히 모으던 중 우연히도 한글로 된 《긔해일긔》한 벌을 1904년 전후에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연 현석문이 지은 원본인지는 알 길이 없고, 더구나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탓으로 첫 장과 끝의 몇 장이 다 썩어 버려 알아 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 외에 다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자, 1905년에 이 책을 그대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246페이지에 달하는 큰 책으로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원문대로의 내용을 그래도 실렸는데, 총론과 순교자의 일기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현석문이 조사한 순교자의 수는 사형으로 순교한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으로 도합 114명이 넘었으나, 그의 《기해일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들어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기해년에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50명으로 그들은 거의 전부가 서울에서 치명(致命)한 것으로 되어있다. 《기해일기》에 올라 있는 78명의 순교자 중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른 순교자의 수가 69명에 이르고 있음으로 보아, 《기해일기》가 순교자의 사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정확을 기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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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 [한] 己亥迫害

1839년 헌종(憲宗) 5년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대박해로서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 뒤에 일어났다. 박해는 3월 5일(음)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원인은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安東)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僻派) 풍양(豊壤) 조씨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벽파와는 달리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어서 헌종치세(憲宗治世) 초기에도 천주교에 대하여 개의치 않으려 하였고, 나이 어린 임금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다.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 대왕대비의 아버지 김조순이 1832년 4월(음)에 죽고, 세도권은 그 아들 김유근(金逌根, 1785~1840)에게 돌아갔다. 1834년 11월(음)에 순조임금이 돌아가고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 8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오라버니 황산(黃山) 김유근이 대비의 정사를 보필하였다. 김유근은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다가 당상(堂上)[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 역관(譯官)이며 교우인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로 1836년 5월(음) 세례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천주교에 대한 관대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는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산이 중병에 몸이 쇠약하여 마침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자 정권은 우의정(右議政)인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적대시할 뿐만 아니라 풍양 조씨의 세도를 등에 없고, 대왕대비가 천주교도를 처형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천주교도의 체포는 이미 박해 전년 말부터 시작되어 감옥은 이미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의 형조판서(刑曺判書) 조병현(趙秉鉉)은 가능한 한 교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배교(背敎)를 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따라서 이제는 석방이든 처형이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병현은 사정을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고하였고, 이지연은 1839년 3월 5일(음)에 천주교회 박멸책을 김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인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이니 ‘역적’(逆賊)이니 하는 중상과 비방을 되풀이하고, 나아가서 좌우포장(左右捕長)에게 조사와 시찰을 강화토록 하며, 형조판서는 매일 재판을 하여 뉘우치지 못하는 자를 처형할 것이고, 지방에도 공문(公文)을 보내며,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청(奏請)에 어린 헌종은 그대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에도 대왕대비는 단독으로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왕대비도 천주교도는 나라를 망하게 할뿐만 아니라 신유년의 박해도 도리어 만족치 못한 것 같다는 등의 말로 오히려 대신보다도 천주교를 한층 가혹히 비방하였다. 그리고 대신이 언급치도 않은 궁녀에 대해서도 증거가 확실하면 체포해도 좋다 하고, 교인이 아니더라도 성물(聖物)을 가진 자도 중형(重刑)에 처할 것을 지시하였다. 대왕대비는 선교사들의 체험에 의하면, 천주교에 가끔 호의적이었다고 하는데, 풍양 조씨라는 당신의 강력한 세력의 압력에 의해 이런 무서운 박해령에 수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비의 하교(下敎)가 있은 지 보름이 지나도 요인은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이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정기화(鄭琦和)는 만약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의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상소를 3월 20일에 올렸다. 요인(要人) 체포가 더딘 주요 원인은, 포졸들에게 가택의 수색과 가산의 약탈을 금지시킨 데 있었던 것이었다. 형조판서의 3월 20일(음)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도가 도합 43명인데 그 중 15명이 배교하여 석방되었고, 동월 28일자 보고에 의하면, 나머지 28명 중 11명이 배교하여 곧 석방될 예정이라 하였다. 이어 5명이 배교하였으나 남명혁(南明赫), 궁녀 박희순(朴喜順) 등은 끝내 신앙을 지켜 참수(斬首) 순교(殉敎)하였던 것이다.

박해는 4월 말부터 기세가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 때 박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형판(刑判) 조병현이 참판과 더불어 사임하고, 홍명주(洪命周)와 임성고(任聖皐)가 각각 판서와 참판에 임명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이 뜸해지자, 박해에 대비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러 급히 서울로 돌아왔었던 앵베르(Imbert, 世世亨) 주교도 4월 22일(음) 수원(水原)으로 피신하였다. 주교가 피신한지 한 달이 지나서 조정의 세도는 조병구(趙秉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헌종의 외삼촌으로 금위대장(禁衛大將)의 지위에 앉아 국사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그는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인물이라서 등장과 함께 교우들을 색출하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5월 25일(음)에는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새로운 칙령(勅令)이 반포되었는데, 내용은 교우색출에 더욱 착념(着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색은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황산 김유근의 사망과 천주교인 김순성(金淳性)의 배신행위로 정찰(偵察)은 뜻밖의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김순성은, 김여상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교우의 가면을 쓰고 들어와서 교회의 사정을 상세하게 관(官)에 제공했던 것이다. 그의 제보로 6월 7일에는 유진길이 잡혔고, 전후하여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달아 잡히게 되었다. 수원의 양감(陽甘)이란 동리에 숨어 있던 앵베르 주교는 김순성과 포졸들이 행방을 알고 추적하는 중에 7월 3일(음) 포졸 앞에 자현(自現)하였다. 앵베르 주교의 체포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하였는데, 조정은 체포되지 않은 나(羅)와 정(鄭) 두 신부를 잡도록 지시하고 7월 13일(음)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현을 권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두 신부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자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압송되어 오자, 포청은 8월 5일(음)과 7일(음)에 3명의 선교사를 신문하였다. 이들은 천주교를 전하러 이 땅에 자원하여 왔으며, 교우들은 고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은 곧 의금부로 이송되어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과 같이 추국(推鞫)을 받게 되었다.

첫 번째 신문에서, 신부들은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한 다음, 입국시 의주(義州)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고, 서울에서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물음에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판관은 바른 대로 말하면 본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고발을 유도했지만, 이들은 계명대로 남을 해하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이에 더욱 형신(刑訊)이 가해졌으나, 대왕대비는 이들이 주뢰(周牢)와 주장(周杖)으로 죽을 염려가 있고 진상을 밝힐 단서도 없으니 신유년의 주문모(周文謨)의 예에 의하여 효수경중(梟首警衆)[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뭇사람을 경계함]하라 하였다. 이에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는 중죄인처럼 극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국청신문을 받게 되었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여 조선에 데리고 왔으며 이는 교회에 관련되는 일이며 역절(逆節)이 아니라 하고, 부귀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은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법(敎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단정하였다. 정하상도,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면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라에 해가 될 때 임금과 재상들이 이 교(敎)를 금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백서가 주장한 소위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천주교 교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미 체포에 앞서 몇몇 교우와 함께 호교문(護敎文)을 만들어 당시의 재상인 이지연에게 제출한 바 있었는데, 이것이 신유년 박해 때 만들어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와 아울러 교회사상의 귀중한 자료이자 유일한 호교론(護敎論)인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정부는, 정하상과 유진길을 역적으로 몰아 결국 참형(斬刑)을 선고하였다. 조신철도 신앙을 끝까지 지켜서 소위 사서(邪書)를 강습하여 인심을 미혹하였다는 죄목으로 참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앞서 6월 10일(음)에는 이광렬(李光烈)과 여교우 7인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7월 26일(음)에는 박후재(朴厚載)와 여교우 5인이 같은 장소에서 참형되었다. 또한 7월 25일(음)에는 연경(燕京)에서 잡서(雜書)까지도 구입을 금한다는 하교가 내렸는데, 이는 사학에 관련된 문물의 수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8월 14일(음) 새남터에서 선교사 3인의 효수형이 거행되고 이튿날 서소문 형장에서 유진길, 장하상이 참형을 받았으며, 4일 뒤에 같은 곳에서 조신철을 위시하여 9명이 처형되었다. 선교사의 처형으로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고, 배신자 김순성은 교우를 고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리며 이지연 대신 우의정이 된 조인영(趙寅永)은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서울의 옥중 교우들을 교수형(絞首刑)에 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의 최초 희생자는 유진길의 아들 13세의 대철(大喆)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론은 이같이 많은 처형을 염려하고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잔인성을 불평하기 시작하여, 이에 정부는 10월 18일(음)에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한편 그간의 박해를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잔인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조인영이 제진(製進)하였던 ‘척사윤음’(斥邪綸音)을 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서울과 지방에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전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남은 교우들의 형집행을 서둘러 11월 24일(음)에는 최창흡(崔昌洽) 외 6명의 여교우들을 참수하고, 조인영은 옥중의 교우들을 옥에서 비밀리에 처형케 하였다. 12월 27일(음)과 28일(음)에는 박해를 끝내려는 의도에서인지 박종원(朴宗源), 이문우(李文祐) 등 10명을 새남터 못미처 ‘당고개’의 사장(沙場)에서 사형을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다.

기해박해는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것이었다. 경기도와 수도(首都)에서 가장 큰 박해가 가해지고 순교자도 많이 배출했지만, 교우라면 전국적으로 박해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당시의 기록인 ≪긔해일긔≫의 목격자담과 김대건(金大建) 등이 순교한 1846년의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뽑아 교황청에서는 1925년 7월 5일에 이들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기해박해는 천주교와 관련된 세력을 정치적으로 분쇄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1845년엔 조선교구의 제3대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을 동반하고 입국하였다. 박해가 심하고 규모도 전국적이었던 만큼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유식층(有識層) 지도자를 잃은 반면 교회세력은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신앙내용도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복음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갔다. 박해 때마다 교우들이 산간벽지로 이주하여 점차 지방종교로 변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도 짙어졌다. 신앙의 견지에서 박해의 결과는 역시 교회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교회의 고유한 무기인 피와 눈물을 통한 승리인 것이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 中 · 下, 분도出版社, 1979~1980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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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조항 [한] 基礎條項 [영] Organic article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801년 제정한 법률로 77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종교에 대해 무관심하였고, 종교를 정치적 요인의 하나라고만 생각하였던 나폴레옹은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한 후, 프랑스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교황청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이 국민 대다수의 신앙임을 인정하여 가톨릭을 부활시키고, 본당 주임신부의 봉급을 지급하는 대신 교회는 몰수된 교회재산의 환원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합의된 정교조약에다 비밀리에 77개의 ‘기초조항’을 첨부하였는데 그것은 정교조약의 일부를 취소하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 7세(재위 : 1800~1823)는 이에 항의하였지만 나폴레옹은 이 법률의 시행을 강행하였다. 1905년까지 프랑스 정부는 이 기초조항이 정교조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교황청은 비오 7세가 법률의 공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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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신학 [한] 基礎神學 [라] theologia fundamentalis [영] fundamental theology

모든 신학분야의 전제가 되고 기초를 이루는 것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그 전제와 기초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신학 분야는 특히 하느님의 계시를 주어진 사실(factum)로 전제하고 계시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와 달리 기초신학은 계시 자체의 존재와 가능성 및 성격을 연구한다. 즉 계시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 안에 일어날 수 있고 인간에게 전달되며 이해되는가를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에 수반되는 것은 계시의 역사성과 가신성(可信性) 및 계시에 대한 신앙의 타당성 등이다. 이와 같이 기초신학은 계시의 규범과 가신성의 표지를 밝힘으로써 계시의 존재와 성격을 해명하는 것을 이무로 삼는다.

하느님의 계시가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으나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히브 1:1-2).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에 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으며 업적과 기적들은 계시 내용을 믿을 만한 것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어 있다(요한 20:30-31 참조). 그러나 기초신학은 계시 자체와 신앙을 실증하고 정당화함에 있어서 계시 진리와 신앙으로부터 논증하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계시의 성격과 규범을 밝히는 데는 형이상학을 이용하고, 계시의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역사학의 도움을 받는다. 계시의 가능성을 해명할 때, 계시가 시공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의 사고와 언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찰하기 때문에 존재론과 인류학의 도움을 받는다. 기초신학은 영감이나 무류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초신학은 신앙이 없는 이를 위하여 신교신학이 될 수 있다. 계시와 인간의 만남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기초신학은 인간 안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요소를 제거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호교론(護敎論)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사실 기초신학은 과거의 호교론이라 불리는 학문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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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공동체 [한] 基礎共同體 [영] basic Christian community [관련] 공동체

생활공동체라고도 한다. 교회가 거대화함에 따라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조직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 즉 사목(司牧) 한계를 넘는 신자수, 신자들간의 불일치와 거리감, 현저해지는 개인주의적 신앙 등을 극복하기 위해 관심이나 가치, 목적 등이 비슷하고, 1차적이고 계속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작은 모임(small group)을 갖고, 이것을 기초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이 작은 모임을 기초공동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초공동체의 목적은 본당중심의 사목체계에 봉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① 연구모임(study group)이 되는 것, ②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위한 운동(movement)을 하는 것, ③ 구성원 각자가 주체로서 교회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것 등에 있다. 기초공동체는 일시적인 모임이 아니라 영속적인 모임이며, 구성원간의 관계도 일차적이기 때문에 개방된 인간관계를 통하여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기 쉽다. 기초공동체의 구성원은 비슷한 환경과 가까운 주거지역을 가진 사람들로 30~50명씩 모여 모임을 하고 있다.

기초공동체의 적극적인 측면은 ① 기초공동체에서의 경험이 이 세상에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발전하며, ② 연구하는 삶을 통하여 보다 의미 있는 봉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며, ③ 성경공부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④ ‘시대의 징표’를 발견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진하며, ⑤ 교회의 유일한 모델로서 제시된 본당을 중심으로 한 교회제도에 대한 대안(alternative), 혹은 보완(complement)이라는 데 있다. 기초공동체는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어 교회의 사목 발전에 초석이 되고 있다. 1976년 교황 바오로 6세도 회칙 를 통하여 기초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을 장려하였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교회가 신앙을 토착화하여 진정한 교회공동체를 이뤄 나가기 위한 사목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 공동체

[참고문헌] J. Marins and T. Trevisan, Comunidades Ecclesiales de Base, 1975 / T.G. Bissonhette, Comunidades Ecclesiales de Base-Contemporary Grass Roots Attempts to Build Ecclesial Koinonia, 1976 / C. Floristan, Comunidad Christiana de Base, 1976 / Lyman Coleman, Groups in Action – A Mini Course for Small Groups, 1971(성염 역, 기초공동체 건설,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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