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를 중심으로 한 교구. 서울 대교구의 기원은 1831년 조선대목구의 설정시점으로 소급된다.
① 전사(前史) : 17-18세기 이래 우리나라에 도입된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남인(南人學者)들 사이에 천주교리에 대한 연구가 있어, 주어사(走魚寺) 강학(講學) 등으로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벽(李檗)의 권유에 의해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1784년에 귀국하여 이벽 등과 더불어 포교를 시작하고 영세를 집전함으로써 서울에 비로소 신앙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이어 그들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 가성직단을 구성하여 영세는 물론 미사까지도 집전하였던 바, 차차 이러한 가성직제도가 법에 어긋남을 깨닫고, 북경교구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요청에 따라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비로소 목자를 갖게 되어 천주교는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미 1782년에 조선 교회는 북경주교의 보호를 받게 됨으로써 북경교구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교회 창설과 더불어 박해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에는 주 신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니 조선 교회는 다시금 목자를 잃고 말았다.
② 조선대목구 설정(朝鮮代牧區設定) : 이렇듯 박해 속에서 지하에서나마 자생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북경주교와 교황청에까지 호소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은 끊임없이 추진되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하는 한편, 파리 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전교사업을 담당케 함과 동시에 자원해서 조선에 나오기를 간청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초대 대목(代牧)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대목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끝내 뜻으로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고, 뒤따르던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1835년부터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제2대 대목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1837년에 입국하니 조선 교회는 비로소 주교와 신부를 가져 견고한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③ 거듭되는 박해(迫害) : 그러나 기해(己亥)박해로 주교와 신부, 그리고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순교하니 조선 교회는 다시금 목자 없는 폐허가 되었다. 제3대 대목으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5년 입국해서 조선교구 재건에 전력을 다했으나 김 신부는 1846년 병오년(丙午年)에 잡혀 순교하였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는 다행히도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며 전교에 힘쓰다가 1853년에 병사하였고, 그 동안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가 입국하여 성영회(聖孀會)를 조직, 최초로 고아 구제사업까지도 전개하였다. 이어 최양업 신부도 입국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전교에 힘쓴 결과 교세는 날로 신장되어 갔다. 제4대 대목으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1855년에 입국하고 뒤이어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국내에 모두 10명의 선교사가 있었다. 병인박해로 베르뇌 주교가 먼저 순교하자 보좌주교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잠시 제5대 대목이 되었으나 곧 5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 때 요행히 살아남아 조선을 탈출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제6대 대목이 되어 1877년에 다시 조선에 입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④ 문화활동(文化活動) : 이렇듯 박해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도 국내에서 각종 교리서의 번역 보급과 함께 한불자전(韓佛字典), 한어문전(韓語文典) 등의 편찬작업이 진행되어 1880년과 1881년에 걸쳐 간행됨으로써 한국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또한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 (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1874년에 파리에서 간행됨으로써 한국 교회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2년 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제7대 대목으로 임명된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종현성당의 기지를 비롯하여 여러 성당의 건립을 위한 대지를 매수하는 등 교회 재건에 힘썼다.
⑤ 서울 대목구 : 이어 1890년에 8대 대목으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임명되어 1898년에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祝聖式)을 갖게 됨을 계기로, 여러 곳에 성당이 건립되어 전교사업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11년에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개칭되어 충청도 이북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뮈텔 주교가 계속 서울대목구를 맡아보았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해서교안(海西敎案) 등 적고 큰 교난(敎難)이 끊이지 않았으나 교세는 날로 신장되어 전교구역은 멀리 제주도와 간도(間道)에까지 뻗어 나갔다. 이에 1920년에 원산(元山)대목구가 분리되어 함경도와 간도지방의 전교사업은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에 위촉하였고 1927년에는 서울대목구 안에 평양지목구를 독립시켜 미국 메리놀회에 위임하였다. 그리고 장차 한국인 교구 설정을 준비하고자 황해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였다. 교세가 날로 성해지는 가운데 1925년 7월 5일에 로마 교황청에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조선 교회는 다시없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1933년 뮈텔 주교가 선종하고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9대 대목으로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하고, 1942년 초 제10대 대목으로 노기남(盧基南) 신부가 첫 한국인 주교로 성성되어 취임함으로써 비로소 서울대목구의 자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노기남 주교는 일제말기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평양지목구와 춘천 지목구장을 겸임하면서 난국을 타개하여 서울대목구를 지켜 왔다.
⑥ 광복 후의 성장 : 1945년 광복이 되자 노 주교는 전국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고유(告諭)하여 교회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6.25전쟁으로 다시 교회가 파괴되고 많은 신자를 잃는 비극을 초래하였으나 휴전과 더불어 노 주교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여 원조를 청하다가 조국 재건과 교회 복구에 노력한 결과 1962년 3월 10일에는 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서울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됨에 노 주교는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67년 노 대주교가 은퇴하고 윤공희(尹恭熙)주교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곧이어 1968년 4월 9일에 김수환(金壽煥) 주교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6일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병인박해로 순교한 24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어 다시 한 번 한국 교회의 영광을 만방에 빛나게 했으며, 1969년 3월에는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한국교회에 영광을 더해 주었다.
⑦ 현황 : 서울 대교구는 그 동안의 발전에 따라 춘천 · 대전 · 인천 · 수원 등 여러 교구가 독립되어 1982년 현재 관할구역은 서울특별시와 가평(加平)군, 포천(抱川)군을 제외한 한강 이북(3,678㎢) 일원이며 서울 대교구 관구는 수원 · 대전 · 인천 · 춘천 · 원주의 5교구를 속교구로 관하에 두고 있고, 1983년말 교세는 아래와 같다.
신자수 54만 2,852명, 본당 120개소, 공소 18개소, 한국인 신부 250명(교구소속 220명, 수도회소속 30명), 외국인신부 91명(교구소속 1명, 수도회소속 35명, 전교회소속 55명), 한국인수사 79명, 외국인수사 21명, 한국인수녀 962명, 외국인수녀 40명, 남자수도단체 14개, 남자선교단체 4개, 여자수도단체 29개, 국민학교 1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3개교, 대학교 2개교, 대신학교 1개교, 주일학교 119개소, 특수학교 3개교 등이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한국천주교주소록, 1983-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