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9년부터 1377년까지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교황좌에 올랐던 글레멘스 5세,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글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그레고리오 11세 등 7명의 교황을 아비뇽시대 교황 혹은 아비뇽 유폐기의 교황이라 한다. 신정적인 국제국가의 건설을 바랐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세계 지배의 야망에 차 있던 프랑스의 필립왕과 싸워 패함으로써(1309년), 교황권에 대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해지고, 그 뒤 프랑스인의 추기경 수가 증가하면서 교황도 프랑스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글레멘스 5세는 교황이 되면서 로마로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리용에서 착좌식을 거행하고 1309년에는 그의 거처를 아비뇽으로 정함으로써 아비뇽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결과 어느 민족에게도 중립적이었던 보편적 교회가 야심적인 프랑스 군주의 입김을 받아 프랑스의 이익을 옹호하기도하여 후에 서구 대이교의 발생에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직과 교회권위에 가장 심각한 타격이 되었던 것은 개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부당한 금전 징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위신이 상당히 추락되고, 교회의 위계질서와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경향마저 대두되어 종교개혁과 공의회 우위설이 발흥하기도 하였다. 아비뇽시대 교황 7명 모두는 프랑스인이었고,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뒤 1379년에서 1411까지 아비뇽에서는 제네바의 로베르트(Robert, 대립교황 글레멘스 7세), 루나의 베드로(Petrus,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등이 교황을 참칭(僭稱)하기도 하였다.
아브라함 [원] Abraham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구약시대 성조. 기원전 20-19세기에 유프라테스강변 갈대아지방의 우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테라가 붙여준 이름은 아브람(Abram)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다른 식솔들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이주하였다(창세 12:4). 99세가 되자 야훼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Abraham)이라 개명(改名)하였고, 그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창세 17:1-5). 하느님은 약속대로 그가 백 살이 되던 해 아들 이사악을 낳게 해 주셨고(창세 12:1-5), 또 다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그의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 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었다(창세 22). 175세에 그는 그의 재산을 이사악에게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하였다(창세 25).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위대한 족장(族長)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려졌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두 가지 주제, 즉 땅의 자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과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믿음이라는 주제가 일관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인한 계약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관철되었고, 확대 재해석되었다. 초기의 교부들, 특히 로마의 글레멘스와 암브로시오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을 찾아 나선 순종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고, 아우구스티노는 이것을 개인의 소명의식의 전형적인 경우로 보았다. 테르툴리아노, 오리제네스 등은 이사악의 희생을 그리스도 희생의 예표라고 하였다.
아벨라르 [원] Abelard, Pierre
Abelard, Pierre(1079-1142). 철학자. 신학자. 성가작가. 프랑스 낭트 부근의 팔레(Palais)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이미 논리학을 배웠고, 비판적인 유명론(唯名論)으로 기울었다. 그 뒤 철학 · 신학 등 다방면의 연구로 업적은 인정받은 그는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의 교수로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 때 만난 엘로이즈(Heloise)와의 열애는 그의 인생에 새 전기(轉機)를 제공하였다. 엘로이즈의 숙부와 아벨라르 사이에 생긴 불화로 엘로이즈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자 아벨라르도 수사(修士)가 되었다. 그의 삼위일체설과 구원론이 1121년 스와송(Soissons) 지방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기 때문에 노젠(Nogent)에 숨어 살았다.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라 몰려들어 성당을 세웠고, 1128년 그는 성 질다(St. Gildas)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136년부터 다시 파리에서 철학을 강의하게 되었으나, 기욤(Guillaume de St. Thierry)과 베르나르(St. Bernard) 등과의 논쟁에 말려들었다. 상스(Sens) 교회회의에서 베르나르는 아벨라르를 너무 합리주의적 인물이라고 하여 또다시 인단으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는 파란 많은 일생을 통해 많은 저작을 남겨 당시의 문화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고,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변증법을 신학에 적용시켜 독특한 방법론[즉 Sic et non-Methode]을 개발, 성전(聖傳)의 비판적인 검토를 자극하였다. 교부들의 이야기 중에서 모순이 있는 점을 한데 모아 집성한 ≪정과 부≫(正과 不, Sic et non)는 그 대표적 저작으로 스콜라 신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Dialectica≫, ≪De unitate et trinitate divina≫, ≪Theologia≫, ≪Sic et non≫, ≪Ethica seu Scito teipsum≫, ≪Dialogus inter Philosophum Iudaeum et Christianum≫, ≪Hexaemeron≫, ≪Problemata Heloissae≫, ≪Historia calamitatum≫ 등이 있다.
아베로이스주의 [한] ~主義 [영] Averroism
13세기 파리대학 문학부 교수들 사이에서 시작된 철학운동. 14-16세기에 이탈리아, 특히 파두아대학에서 계승되었다. 극단적이며 이교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인 아베로이스(Averroes, 1126-1198)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12세기말과 13세기초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번역 저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잇달아 아베로이스의 주석들이 소개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베로이스의 이론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해한 것이라는 논란이 일어나자 파리대학에서는 1277년 이후로는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아베로이스의 주석은 중세대학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중세학계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나 진정한 의미의 아베로이스주의는 아베로이스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철학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종교의 개입으로부터 철학의 자유를 옹호하는 운동이다.
아베로이스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명문법률가 집안 출신으로 법학 · 의학 · 철학 · 신학 등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아베 마리아 [라] Ave Maria [관련] 성모송
라틴어 원문으로 된 성모송의 제목. ‘Ave Maria, gratia plena’로 시작되는데 그 첫 단어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 성모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