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1)
사막 교부들에게는 하느님께로 가는 일이 언제나 자아인식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려면 먼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자아인식이 함께 하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단순한 투사일 위험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경건한 생활에로 도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경건함은 기도와 경건한 생활로 변화하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경건함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어느 훌륭한 신학자가 사막의 수도승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스승님과 영성 생활에 관해서, 하늘나라에 관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 수도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신학자가 이야기 하는 것만을 듣기만 했습니다. 답답한 신학자는 화를 냈고 마침내 그 수도승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가 수도승에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 신학자는 자기 고향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오로지 스승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일념으로 이 사막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해 주지시 않으십니까?”
그러자 수도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높은 데서 살며 하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아래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세상 일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라네. 만일 그가 영혼의 욕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내가 대답을 했을 것이라네. 그런데 그는 영적인 것과 거룩한 것들에 대해서 말해서 내가 못 알아들었다네.”
수도승에게 있어서 영성 생활이란 영혼의 욕정을 관찰하고 투쟁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느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며, 그러면서 비로소 하느님께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주에 계속)
나를 알기(2)
수도승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는 얼른 달려 나가 그 신학자를 붙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늘나라나 영성생활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누가 영혼의 욕정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기꺼이 대답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다시 수도승에게로 왔습니다. 수도승은 반갑게 그 신학자를 맞이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이제야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혼의 욕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제가 보화로 가득 채워 드리겠습니다.”
신학자는 수도승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영성생활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내적 투쟁”이 없는 영성생활은 아무 쓸모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신학자는 경탄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참으로 옳습니다. 스승님과 이야기하면서 영성생활의 참된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영성생활은 현실적인 자아를 인식하고, 인정할 때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흙에서 온 나 자신”안으로 겸손하게 내려갈 때 그 길에서 하늘나라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용기를 가질 때,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상상을 가지고,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나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들어 낸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는 이들은 결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결코 자비를 청하지 않습니다. 내 죄를 끊어 버리고 나 자신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