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병헌작 [한] 獻餠獻爵 [관련] 성찬의 전례

빵과 포도주의 봉헌. 즉 미사의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가 제병(祭餠)이 담긴 성반(聖盤)과 포도주가 담진 성작(聖爵)을 두 손을 높이 들어 봉헌하는 예절을 말한다.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인간이 먹고 마시는 음식이며 곧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의 봉헌은 인간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사제는 사제 자신과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제물로 이를 봉헌한다. 이 빵과 포도주는 미사 중에 성변화(聖變化)를 거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

헌병헌작에 사용되는 제병은 보통보다 큰 것이며, 사제는 포도주와 함께 물을 포도주 분량의 3분의 1 이하의 양으로 섞어 성작에 붓는다.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고대의 일반 풍속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과월제에서도 이런 예식이 있었고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도 이 예식을 행하셨다. 물을 포도주에 섞는 상징적인 의미는 인간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돌아가셨을 떼 예수의 늑방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연상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예식은 초기부터 미사예식에 들어왔으며 성 치프리아노(St. Cyprianus)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 신자들 상호간의 일치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였다. (⇒) 성찬의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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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당첨례 [한] 獻堂瞻禮 [관련] 주의 봉헌 축일

주의 봉헌 축일의 옛말. 성모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성전에 봉헌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이렇게 불렀다. ⇒ 주의 봉헌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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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한] 獻金 [라] collectio [영] collection

미사성제 도중 봉헌하는 금전. 세계교회에서는 미사헌금(collection during Mass)이라 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주일헌금(主日獻金)이라고 한다. 헌금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사도 4:34, 6:1, 1고린 9:8, 2데살 3:8). 초대교회에서의 헌금은 성직자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고, 헌금의 시기는 미사 도중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헌금의 성격은 전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미사성제와도 본질적인 연관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4세기경부터 미사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 및 기타 필요한 것을 신자들이 미사 중에 봉헌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헌금도 함께 봉헌되면서 헌금은 전례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 후 11세기 경 빵과 포도주의 봉헌 대신 헌금만을 봉헌하는 신자가 늘어가자 마침내는 헌금만을 봉헌하게 되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헌금의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헌금자의 자기희생의 상징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봉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교회의 중개행위가 따라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평신도는 교회에 헌금하여 교회가 희생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도록 일임하는 것이다. 그 재료 중 희생제물인 빵과 포도주는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여, 평신도는 사제와 함께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에 포함시켜 봉헌하는 것이다. 따라서 헌금은 자기희생의 상징이며 희생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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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 [한] 許∼

허임(1795∼1840).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바오로.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기해(己亥)박해가 한창 치열하던 1839년 8월경에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의 신분이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병정이라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포청에서 혹형을 처음엔 잘 참아 냈으나 하루는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배교를 취소했고,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人糞)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 없이 인분을 받아 마셨다. 그 뒤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혹형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를 이겨내고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달레의 기록에 ‘He Heim-i’로 나와 있어 많은 이들이 ‘허혐’ 또는 ‘허협’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원사료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He-im’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허임’으로 표기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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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백 [한] 許仁伯 [관련] 진목정

허인백(1821∼1868). 순교자. 세례명 야고보. 김해 허씨의 후예로 김해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황사국(黃士國)에게 교리를 배워 1846년경 25세의 나이에 영세, 입교했다고 전한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언양을 거쳐 죽령(竹嶺)[대나무고개] 산골의 교우마을에 숨어들었다가 그 곳에서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회장, 김종륜(金宗倫, 루가) 등과 만났다. 이들 3사람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 속을 헤매다가 경주땅 산내(현재 경북 월성군 산내면)에 있는 소래동 단수골이란 석굴(石窟)을 발견, 그 곳을 피난처로 삼고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며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1868년 5월 ‘덕산묘지 도굴사건’의 여파로 전국적인 박해가 있었고, 이들 셋은 이 때 경주아문의 포졸들에게 잡혔다. 경주아문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8월 울산감영으로 이송되어 이틀 뒤인 8월 14일(음 7월 28일) 장대벌 형장에서 효수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조애에 의해 수습되어 사형장 근처의 다리 밑에 가매장되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면서 3인의 유해는 월성군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되었고, 1932년 5월 29일 대구 감천리 공원묘지로 이장, 1962년 10월 25일 석곽에 모서져 공원묘지 산 위에 있는 성모석상 앞으로 옮겨졌다가 1974년 10월 신천동 복자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 (⇒) 진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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