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시움 [원] Byzantium

동로마제국의 옛 수도. 1453년 터키군에 함락된 후로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1923년까지 터키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스, 아르메니아, 불가리아 등 라틴식 전례의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제2, 제5, 제6, 제8 회 공의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비잔티움은 기원전 7세기 중엽 그리스의 식민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2세기 중엽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에 이곳을 로마제국의 새 수도로 정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였다. 그는 여기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고, 335년 로마와 그리스의 미술품을 옮겨 장식하였다. 황제는 이곳에 수많은 그리스도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소피아(Sophia)성당은 비잔틴 예술과 고대건축술의 정화로 평가된다. 그는 이교의 신전을 짓는 것을 금했으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개방적이었으므로 예술과 의학, 법률이 융성하고 철학, 수사학, 변론술 등이 발달하였다. 이 곳의 교회들은 단시일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총주교좌가 되고, 한때는 세계 총주교(ecumenical patriarch)로 자처했으나, 로마 교황은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이곳, 비잔틴은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의 중심이 됐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위치하여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 역사적인 문화도시는 수많은 외침을 받은 역사로도 유명하다. 터키군이 이곳을 함락하여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이 멸망했을 때 동로마의 학자, 문인들은 이탈리아로 피해갔는데, 이것이 서유럽에 르네상스의 큰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395년, 로마가 결정적으로 분열된 후 동로마제국은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의 그리스도교적 형태를 띤 로마 세계제국의 정통적인 계승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자는 로마의 황제요, 그 백성은 로마인을 자칭하였다. 제국은 항상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전세계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그 내적인 특징은 헬레니즘적 특색을 가진 동방적 요소와 융합된 그리스 세계의 그리스도 교화로서 국가가 교회보다 우위를 차지한 점이 그 특징.

[참고문헌] K.E.P. Wulzinger, Byzantinische Baudenkmaler zu Konstantinopel, 1925 / New Catholic Encyclopedia, Washington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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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한] 比喩 [라] parabola [영] parables

1. 의의 : 사물을 병치(竝置)한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가 어원으로서, 고대 그리스 웅변술에서 수사법(修辭法)의 하나로 널리 애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로 설교한 그 배경은 이러한 수사법에 있으며, 통산 직유와 은유로 분류된다. 직유란 어떤 사물을 설명함에 있어서 다른 사물의 속성에 비교하여 ‘∼같다’, ‘∼처럼’과 같이 표현하는 것으로 마태오 23장 21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한 표현이 대표적이고, 은유는 압축된 직유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동일시하거나 균등화한 것으로서 한 사물의 속성은 직접 다른 사물의 속성에 귀착된다. 은유의 대표적인 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한 예수의 말을 들 수 있다. 비유는 직유가 발전한 것으로 이야기가 허구적이지만 통상 우화(寓話)와는 구별된다. 비유에는 그 의미를 숨기지 않으나 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2. 비유 해석학 : 예수가 행한 비유는 도덕성을 강조한 이외는 아주 단순하여 비유적 의미가 없다는 학자도 있으나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 견해에 반대하고 복음서의 세 가지 주요 비유는 성서 해석학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마르 4:13-20), 잡초의 비유(마태 13:36-43), 고기그물의 비유(마태 13:49-50) 등이다.

3. 예수 비유의 특징 : 예수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할 때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 화재(話材)를 취하여 이야기 내용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하고 화법으로서 광휘를 더하게 하였다. 그러한 화법이 이해하기가 용이하면서도 거기에는 무언가 깊이 생각해야할 여지를 항상 남기고 있다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비유는 화자(話者)의 화술이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3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인데, 이야기의 내용에 생동감과 비유로서의 효과를 내고 있다.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항상 이야기의 전달 중점은 제 3의 인물에 있게 마련이다. 이리하여 비유에는 세 사람의 하인에게 그 재능을 시험하고, 세 사람이 강도들에게 쓰러진 한 사람의 앞을 지나가고 있다. 예수의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예상되는 결론이 급전(急轉)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여운을 남기는 것이 특징이다. 탕자(蕩子)의 비유 같은 것이 그것인데,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보다 방탕하여 가출하였던 아들이 동정을 받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놀라게 되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4. 문제점 : ① 복음서의 비유에 나타나 있는 환경에 대한 이해이다. 예컨대 동일한 성질의 비유가 각각 다른 환경에 등장하는 경우이다(마태 22:1-10, 루가 14:15-24). ② 복음서의 비유가 지향하고 있는 대상인물에 대한 문제이다. 많은 비유가 주로 예수의 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설교가 주로 교회에서 행해지면서 바리새인들의 의미가 격감(激減)되었으며, 오늘날 문제되는 것은 비유가 그리스도 교인과 그리스도 교인의 생활을 위하여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10, McGraw Hill, 1967 / B.T.D. Smith, The Parables of the Synoptic Gospels, New York 1937 / J. 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 New York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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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라] Pius

Pius 5세(1504∼1572). 교황(재위 : 1566-1572). 성인. 원명 Michele Ghislieri. 14세 때 도미니코회에 입회, 24세 때 사제로 서품(敍品)된 후 철학 · 신학교사, 도미니코회 수도원장을 거쳐 이단심문소 재판장이 되었다(1551년). 그 후 네피 및 스토리의 주교, 이어서 유럽 전체를 통괄하는 이단 심문소장을 거쳐 비오 4세의 후계자로 교황이 되었다. 교회 개혁을 위해 금욕생활을 장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규(敎規)를 엄밀히 시행, 프로테스탄트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교황수위권 확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재위 중에 영국의 엘리자베드 1세를 파문했는데, 이것은 커다란 실패였다.

Pius 6세(1717-1799). 교황(재위 : 1775-1799). 원명 Giovanni Angelo Braschi. 이탈리아의 체세나 태생. 신성 로마황제 요제프 2세의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에 의한 교회개혁에 강경히 반대하였다. 프랑스혁명 때는 교황 권한 억제 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비뇽, 베나이싱 등의 영지를 접수당했고, 또한 나폴레옹 1세에게도 저항했다가 많은 교황령을 양도당한 후 체포되어(1798년) 프랑스의 발랑스에서 죽었다. 교황권이 가장 쇠미하고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강했던 시대에 교회를 위한 투쟁으로 일평생을 마쳤다.

Pius 7세(1740-1823). 교황(재위 : 1800-1823). 원명 Luigi Barnaba Chiaramonti. 이탈리아의 체제나 태생. 프랑스와의 절충이 생애를 통해 중요과제였다. 정교(政敎)조약을 체결(1801년), 초청을 받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주재했으나(1804년), 프랑스와의 관계는 호전되지 않고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당하였다(1809년). 그는 나폴레옹 1세를 파문에 처하고, 자신은 사보나에 감금된 후 퐁텐블로로 옮겨졌다(1812년). 나폴레옹의 퇴위와 함께 로마로 귀환(1814년), 같은 해에 예수회를 재건하였다. 이어서 교황령의 회복, 이단심문의 부활, 교회정치의 쇄신 등에 진력함으로써 교황의 지위를 강화하였다. 일반 문화 방면에 대해서도 그 진흥을 위해 힘쓰는 등 혁명 후의 질서회복에 노력하였다.

Pius 9세(1792-1878). 교황(재위 : 1846-1878). 179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 1819년 서품, 교황청 해외 주재 사절로 칠레에서 근무(1823∼1825년), 1827년 대주교, 1840년 추기경을 거쳐 1846년 자유사상가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압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1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자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으며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교황청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 1859년 로마냐(Romagna)를,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체스(Marches)를 잃고 1870년 로마가 함락된 후 구아란티법에 의해 교황의 모든 세속 주권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계제도를 회복시키고(1850, 1851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제(諸) 정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교구 및 선교 중심지를 탄생시켰다. 또한 성모의 무염시태 교리를 정의하고(1854년),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 및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1864년).

Pius 10세(1835-1914). 교황(재위: 1903-1914). 성인. 원명은 사르토(Giuseppe Melchior Sarto). 이탈리아의 리세(Riese)에서 태어나 특히 어머니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서품(1858년) 후 톰볼로(Tombolo)에서 9년간 보좌신부를, 살자노(Salzano)에서 8년간 주임신부를 하고 만투아(Mantua)의 주교(1884년),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추기경 등을 거쳐 1903년의 콘클라베에서 레오 13세를 계승하였다. 그는 청빈, 사도적 사명감, 하느님에 대한 흠숭, 지도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사회 각 방면에 깊은 관심을 지닌 교황이었다. 그는 재임기간의 지도 방침을 첫 교서 (1903. 10)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사회에 해(害)가 되고 있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원(疏遠)과 배교(背敎)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권위,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순명, 교황권의 확장 등이 달성되어야 함을 확신하였으며, 새로운 과학사조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법칙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신학이나 철학 및 해석의 영역에서 지식층에 깊숙이 침투하여 있던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일은 그의 커다란 과제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교황의 강경한 태도는 프랑스 및 구미제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반(反)성직주의와 때를 같이 하였으므로 프랑스의 교회재산의 세속화나 이탈리아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오랜 문제에서 교황청 측의 양보, 영국 · 러시아 · 미국 · 에콰도르와의 불화 등을 낳았으나 미국의 국제평화와 라틴아메리카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케 한 점 등은 교황의 위신을 높였다. 교황은 또한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비롯한 성음악(聖音樂)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고,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고 일관성 있게 정리하기 위해 교회법전의 성문화에 착수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회헌장 을 통해 교회의 중앙정부를 간소화시키고 강화시켰다. 또한 성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교황의 성서연구소도 설립하였으며 많은 순교자와 수도단체의 창립자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돈독한 신앙과 겸손을 갖춘 이 교황을 깊이 기억하였으며 1923년부터 시성운동이 추진되어 1951년 시복되고 1954년 시성되었다. 축일은 9월 3일이다.

PIus 11세(1857-1939). 교황(재위 : 1922-1939). 1857년 출생. 1879년 서품. 밀라노 대신학원에서 교의학(敎義學)을 교수(1883∼1888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의 관장(1907년)과 바티칸 도서관의 부관장(1912년), 추기경 및 밀라노의 대주교(1912년)를 거쳐 교황으로 피선(1922년).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주임무로 생각,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제정하였다(1925년). 그의 위대한 교서들은 모두 같은 목적으로 쓰여졌는데 (1929)는 교육을, (1930)는 결혼 생활에서의 존경의 회복을, 그리고 가장 유명한 (1931)는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라테란 조약(1929년)의 체결이며 교회의 영성생활은 성녀 소화 테레사와 성 베드로 가니시오 등 많은 성인들의 시성이 있었던 1925년의 성년(聖年)의 해, 그리고 가톨릭 액션에서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그의 지지, 그리고 종교적 봉헌을 증가시킬 것을 권하는 그의 교서들로 인해 고양되었다.

Pius 12세(1876∼1958). 교황(재위 : 1939∼1958). 1876년 로마 출생. 1899년 서품. 1901년부터 바티칸 국무성에서 근무, 여러 요직을 거쳐 1930년 비오 11세에 의해 추기경 및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사절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미국 및 유럽의 성체대회에 참가. 국무장관의 해외여행이라는 전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선임 비오 11세의 비공식적 요망이 실현되어 1939년의 콘클라베에세 교황으로 선출되어 2차 대전과 격동의 시기에 재위했는데 초기에는 교회의 내적 문제에서 쇄신의 요구에 응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적 육체인 교회 안에서의 일치를 강조하는 교서 (1943), 가톨릭 교회 내의 성서 연구의 열을 높인 교서 (1943), 전례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1947)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계의 새로운 경향을 비난한 (1950) 등 보수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또한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의 교리 발표(1950년), 바티칸 지하의 베드로 사도의 묘 발굴, 선임 교황들을 비롯한 33명의 시성, 성주간의 전례 개혁, 세계 각처의 많은 수의 추기경 증원(1946년 32명, 1953년 24명) 등 많은 일을 하였다. 2차대전 때 나치의 잔학 행위에 대한 그의 ‘침묵’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전쟁의 종결, 그리고 특히 난민과 죄수를 위해 노력, 교황청 원조위원회(P.C.A.) 등을 통해 많은 구호사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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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 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Viennense [영] Council of Vienne [관련] 공의회

제15차 세계 공의회(1311∼1312년). 글레멘스(Clemens) 5세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주요 의제는 이단과 부도덕성으로 단죄된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였고 이 밖에 성지(聖地)수복을 위한 지원 및 교회 개혁의 문제 등이었다. 처음에 공의회의 다수파는 수도회의 재산을 노리는 프랑스 측에 맞서 단죄의 증거가 불충분함을 지적하였으나, 교황청이 아비뇽(Avignon)으로 이전되자 공의회는 프랑스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1312년 2월 프랑스의 필립(Philip) 4세는 군대로 비엔을 위협, 교황은 교령 (1312. 3)을 통해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시켰으며, 다음 회기에 이를 공표하였는데 이는 명목적인 것이었다. 공의회의 기러한 결정에 대해 필립왕은 6년 안에 십자군 원정에 참가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끝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원정을 위해 징수된 십일조와 수도회 재산을 착복하였다. 이 공의회는 프란치스코회의 영성 문제에서 좀더 엄격한 측을 옹호하였으며 여러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 중에서 베긴(Beghin)회(會)와 종교재판에 관한 것은, 다음 대의 교황 요한(Joannes) 22세의 에서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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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모 [원] Villemot, Marie Pierre Paul

Villemot, Marie Pierre Paul(1869∼1950).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선교사. 한국명 우일모(禹一模). 프랑스에서 출생.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국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3년 전라도 고산(高山)의 차돌박을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 전교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전주(全州)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도지방의 모교회(母校會)격인 고산 되재(升峙)본당을 창설, 성당을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으며 그 뒤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겸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문제를 담당하고,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 주임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사목을 떠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하셨다.

[참고문헌] 天主敎會藥峴地方史, 藥峴天主敎靑年會, 1933 / 金九鼎 · 金榮九 共著, 天主敎湖南發展史, 天主敎全州敎區, 1964 / 金昌文 · 鄭宰善 共編, 韓國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코리아社,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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