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대서양 서부에 있는 작은 도서군으로 영국의 직할 시민지. 총면적 53㎢, 인구 약 5만명(1982년 추계), 그 중 약 60%가 흑인이다. 뉴욕 남동쪽 약 1,100㎞에 위치한다. 300여 개의 작은 섬들이 약 40㎞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20여 개에 불과하다. 섬의 주위에는 해안과 평행으로 산호초가 펼쳐지고, 각 섬은 너비 400m~3㎞의 크기에 평탄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에 17℃, 여름에 26℃, 연평균 22℃의 온난한 기후와, 1년을 통해 고루 내리는 적당한 강우량은 아름다운 열대식물을 무성하게 하여 이 제도가 쾌적한 휴양지가 되게 하였으며, 연간 40만명에 가까운 관광객을 불러들여, 이 섬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인구 약 7만명에 가톨릭 신자는 약 1만명(1982년 현재)이다.
백한성 [한] 白漢成
백한성(1899~1971). 법조인. 아호는 서진(曙津). 세례명 알로이시오. 충남 논산군 은진면 내동리에서 부 백낙호(白樂鎬)와 모 천씨(千氏) 사이의 8남매 중 2남으로 출생.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청주법원 입회서기로 근무하였으나 일본인 판사의 민족적 편견에 대해 항의하고 맞서다가 사직하고 도일(渡日), 고등고시에 합격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평양, 청진, 순천 등지에서 판사로 근무하였고 이 때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광복 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1948년 11월 법무부차관,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처 1949년 대법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51년 서울대 법대 강사, 탄핵심판관, 헌법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였으며 1953년 내무부 장관, 1954년 국무총리서리를 역임하였다. 1955년 다시 사법부로 복귀, 대법관을 근무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자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변호사를 개업, 서울변호사회 상무위원장, 서울시 수석 법률고문, 한국 신문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971년 10월 12일 뇌일혈로 쓰러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튿날 사망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金) 데레사와 3남 3녀가 있다.
백초구본당 [한] 百草溝本堂
연길교구 소속 본당으로 1939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백초구시(滿洲 間島省 延吉縣 百草溝市)에 창설되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폐쇄되어 지금까지 침묵의 본당으로 남아있다.
백지사 [한] 白紙死
사학죄인(邪學罪人)을 처형한 형(刑)의 일종. 죄인의 손을 뒤로 묶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것. 얼굴에 종이를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塗貌紙) 즉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정원진(鄭元鎭)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고조부 정은(鄭溵, 바오로)이 1866년 남한산성에서 백지사로 순교했다고 한다.
백동 [한] 柏洞, 栢洞 [관련] 혜화동본당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惠化洞)의 옛 지명으로 교회사적지(敎會史蹟地). 속칭 잣골, 또는 잣나무골로 불렸다. 조선조 태종(太宗) 때의 공신 조은(釣隱)이 이곳에 잣나무 숲을 만들고 그 속에 백림정(柏林亭)이란 정자를 만들었다 해서 백동으로 불렸고, 또 성균관(成均館)의 동서로 반수(泮水)가 흐르고 있어 반촌(泮村)으로도 불리다가 일제시대인 1914년 현재의 동명 혜화동(惠化洞)으로 바뀌었다.
백동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부터 교회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곳이다. 1787년 10월 당시 성균관 유생이던 이승훈(李承薰)이 정약용(丁若鏞)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이곳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강독하다가 이기경(李基慶)의 고발로 인해 소위 ‘정미 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나게 되었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에는 장치선(張致善) · 김계교(金季釗) · 이연식(李連植) 등이 피신해 있었다. 그 후 1909년 독일 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자 이곳에 수도원과 숭공(崇工)학교, 숭신(崇信)사범학교를 세웠고, 1920년 베네딕토회가 원산으로 진출함에 따라 서울교구에서 이를 인수, 1927년 혜화동본당을 창설시키고, 1929년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시켰으며, 이어 1931년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던 남대문(南大門)상업학교를 다시 이곳으로 이전시키고 동성(東星)상업학교로 개명하였다. 현재 백동, 즉 혜화동 일대에는 혜화동본당을 비롯하여 가톨릭대학 신학부, 동성중 · 고등학교, 교리신학원, 가톨릭학생회관 등의 교회기관들이 자리하고 있다. (⇒) 혜화동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