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덴 [원] Weyden, Rogier van der

Weyden, Rogier van der(1399?-1464). 플랑드르의 종교화가. 프랑스명은 Roger de La Pasture. 북부 르네상스 화가로는 아이크 형제(Hubert van Eyck와 Jan van Eyck)말고는 가장 영향을 많이 준 화가였다. 1426년 브뤼셀의 여인과 결혼한 뒤부터 투르네이(현재 벨기에에 있음)에 있는 캄핀(Robert Campin)의 공방(工房)에 들어갔다. 그 뒤 독립해서 브뤼셀에 정착, 명성이 높아지면서 메디치가를 위시하여 많은 부르간디 궁정으로부터 작업 의뢰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미술은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멤링(Hans Memling)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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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리노 [라] Paulinus, a Nola

Paulinus, a Nola(353-431). 성인. 축일 6월 22일. 정식 이름은 Pontius Meropius Anicius Paulinus. 프랑스 보르도에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이탈리아 놀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르도에서 오소니오(Decimus Magnus Ausonius)에게 학문을 배운 후, 379년경 캄파냐(Campania)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그 후 스페인의 재산가의 딸과 결혼했었다. 389년 보르도에서 영세한 후 바르셀로나(Barcelona) 부근에 정착, 빈민구제에 힘썼다. 395년 사제로 서품, 409년 놀라의 주교가 되어 많은 성당을 세우고, 최초로 성당에서 종(鍾)을 사용케 하였다. 만족(蠻族)이 캄파냐에 침입했을 때 놀라시(市)를 구제하였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등과 친교가 있었다. 교부시대의 라틴 시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시 · 서간이 많이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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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특전 [한] ∼特典 [라] Privilegium Paulinum(fidei) [영] Pauline Privilege

비(非)세례자 부부간에 성립된 혼인에서 부부중 한 쪽이 세례를 받은 후, 상대방이 평화로운 동거생활을 거부할 경우 세례자는 혼인의 해소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그 근거는 1고린 7:12-15인데, 4세기 이래 대다수 가톨릭 주석가들은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이 특전의 성립요건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① 비세례자 부부 쌍방의 혼인이 유효해야 한다. 유효하지 않다면 이를 논할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유효성에 관한 의문은 조사하여 먼저 해소되어야 한다. ② 부부의 일방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 특전을 행사하기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므로 예비신자 부부에게 적용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또 부부 쌍방의 세례가 의심스러울 때 신앙교리성성에 의뢰하여 해결할 수 있다. ② 비신자 측의 물리적 혹은 도덕적인 떠남(departure)이 있어야 한다. 비신자 측이 신자인 배우자와 동거 생활을 거부하거나 질병. 재혼 등으로 동거가 불가능할 때는 물리적인 떠남의 경우이며, 비신자 측이 동거를 동의하나 평화롭게 혹은 창조주를 거스림이 없이 동거를 하려는 의도가 아닐 때는 도덕적인 떠남의 경우이다. ④ 떠남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비신자 측에게 질문을 하여야 한다. 그가 세 례받기를 원하는지, 그가 적어도 이미 세례받은 배우자와 동거를 원하고 평화롭게 창조주를 거스림이 없이 살고자 하는 지를 명백하게 물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두 부정적이면 이 특전의 성립이 가능하나 적어도 하나가 긍정적이면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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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신학 [한] ∼神學 [영] Theology of St. Paul

사도 바울로에게서 어느 정도 분명한 신학적 체계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여러 편지의 단편적 성질로 볼 때, 자세하게 연관성을 지어 서술한 경우란 거의 없다. 그의 편지는 그때마다 특정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것이므로 대체로 사목적(司牧的) 성격을 띠고 있다. 이 편지들은 사도 바울로의 전도설교를 전제로 하지만, 그 본성과 내용은 산발적 섬광같은 빛을 보여 줄 따름이다. 그가 신학적으로 사고(思考)했던 것은 사실이나, 기록한 모든 것은 역사와 논쟁의 특수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 그러므로 그의 서간 총집을 바울로의 조직신학책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교훈과 권고 속에 흐르는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실천에 있어 찬연한 권위를 발휘한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어떤 인간적 매개나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나에게 직접 온 것”이라고 바울로는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중심에 자리 잡는 것은 오직 한 분인 구령(救靈)의 중개자이며,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의 편지는 사실상 철두철미한 그 자신의 것이었기에, 그는 그것을 ‘나의 복음’ 아니면 ‘우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였다. 바울로 신학은 본질적으로 성서신학이라고도 하지만 뿌리의 한편에는 구약성서와 율법학자(律法學者)의 전통이 깔려 있고,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의 역사적 사실과 사도전승, 그리고 직접적인 그리스도로부터의 계시 속에 담겨 있다. 이른바 ‘유태교적 혼합물’은 반대자를 그 자체의 기반으로부터 무너뜨려야 되는 경우에 반유태교 논쟁을 통해서 가장 명쾌하게 진가를 발휘하였다.

여기서 바울로는 어쩔 수 없이 유태교 신학의 범주와 논쟁에 필요한 반유태교적 방식과 증명을 통해서 싸웠지만 그런 논쟁과 관련이 없을 때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식(定式)을 전개하였다. 형식적으로 볼 때 신학자 바울로는 율법학자적인 성서 해석과 그렇게 훈련된 증명법을 쓸 때에는 유태인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인 것은 결코 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유태교를 떠나서 할례와 율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찾아가는 새로운 종교와 경건한 시대적 제약 속에서 변화될 수 있는 하나의 표현방식에 불과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바울로의 설교는 헬레니즘보다는 유태교에 의해, 율법학자의 사상권(思想圈)보다는 구약 예언자의 사상권에 의해, 선배 사도들 의 정신보다는 예수의 정신에 의해 한결 더 강하게 형성되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의 종교적 지도와 경험의 빛을 통해 바라보고, 철저히 사고하며 해석하여 일반화시켜 갔다. 철저한 사명의식과 독자적인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바울로는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내적 저항과 이율배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무너뜨릴 수 없는 긴밀한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룬다. 전체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구상(構想)이 빛나고, 그 중심에는 일체를 속죄하고 모든 것을 구원하는 십자가가 굳건하게 서 있다.

[참고문헌] G. Cerfaux, La theologie de I’Eglise suivant Saint Paul, Paris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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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대성전 [한] ∼大聖殿 [영] St. Paul’s Outside the Walls

로마의 5대 바실리카의 하나로 로마 교외(郊外)에 세러져 있다. 성당이 세워져 있는 곳은 원래 바울로의 묘지가 있던 곳으로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념 성당이 세워졌었으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재위 : 375-392년)가 대성전을 건립하기로 하여 38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플로비아누스 호노리우스에 의해 395년 완공되었다. 1823년 대화재(大火災)로 거의 대부분 불타 없어진 위에 다시 세워진 대성전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내부의 넓은 복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며, 마조레호(湖)에서 옮겨온 화강석으로 조각된 28개의 원주(圓柱)가 아치 모양의 지붕을 떠받히고 있다. 이 위에 베네딕토 15세까지의 교황들의 상이 부조되어 있다. 중앙 제단에는 1285년경 제작된 캄비오(Arnolfo di Cambio)의 작품인 성궤(聖櫃)가 놓여져 있는데, 그 바깥에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부조되어 있다. 석고 기둥이 중앙 제단의 천장을 떠받히고 있으며, 그 아래 원형의 갱도(坑道)로 연결된 지하에는 화려한 관이 있고 그곳에 성 바울로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뒷벽에는 그리스도와 베드로 및 바울로가 배치된 정교한 5세기 때의 모자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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