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신앙 [한] 巫俗信仰

무속신앙은 일반적으로 동북아시아 일대에 퍼져 있는 종교현상의 하나이다. 사제(司祭)인 샤먼(shaman)과, 그에 의하여 집전되는 제의(祭儀)와, 그 제의를 요청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이 무속신앙은 특히 사제와 제의 참여자들의 탈자적 경험(ecstasy)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탈자적 경험은 초월적인 존재나 효과의 합일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 합일을 통하여 터득되는 새로운 인식과 정서적 안정, 그리고 현실적인 기대의 충족 등으로 살아간다. 우리나라에 무속신앙이 자리 잡은 역사적 기원을 분명하게 고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속신앙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종교적 심성을 결정한 근원적인 종교경험이었으리라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역사적 사료에서 나타난 고대 제의의 제반 특성에 무속신앙이라고 유추되어질 수 있다는 점, 민족지적(民族誌的) 발견들에 의하면 현존하는 무속신앙이 아득한 연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들이 그 예일 수 있다. 따라서 무속신앙은 첫째 한국인의 본래적인 종교경험이고, 둘째 그렇기 때문에 무속신앙은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결정하는 기층종교라고 하는 이해가 대체로 지배적이다.

그러면 무속신앙은 어떠한 신령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무속신앙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다. 자연신계통, 인신계통, 그리고 기타신 계통으로 분류해 보면 봉안된 신들 중의 많은 수가 자연신계통에 속하고 있다. 이를 다시 가신(家神), 동신(洞神), 자연현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신, 사령신(死靈神), 무속시조신, 인간의 생명현상과 관련된 신, 외래종교의 신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신들은 무속신앙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신들은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특정한 직능 또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둘째, 각 신들은 그의 고유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간의 위계나 정리된 신통기(神統記)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신들은 형이상학적 가치나 이념으로 성화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을 능가하는 초월적 힘 또는 영역(靈力)으로 인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관(神觀)과의 관련에서 보면 무속신앙은 바로 그 힘과 인간과의 관계구조의 상황적 전승적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속신앙은 인간이 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출현과 소멸, 그 어간에서의 삶의 현실이 ‘자연스러움’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늙음도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인 한 그것을 삶의 한 모습으로 여긴다. 또한 인간은 결코 개별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 혈연을 축으로 한 가족 및 지역 공동체내의 관계적 실존을 살아가는 개체이다. 따라서 무속신앙은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태어나 가족을 이루어 살다가 죽는 존재, 그리고 살아 있을 동안 자연스럽게, 곧 고생하거나 불행하지 않게 살다가 불의의 죽음을 죽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죽고,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자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유지하거나 끊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속 신앙에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있을 뿐 해탈이라든가 부활이라든가 하는 현존재의 초극(超克)이나 부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무속신앙의 우주는 하늘 · 땅 · 사람으로 이어지는 종적(縱的)인 삼층구조를 이루고 있지도 않고, 존재와 무(無)로 대립되는 양극적인 세계도 아니며, 차안과 피안이 평면적으로 전개되는 수평적 구조도 아니고, 그것이 단절되어 중첩된 이중적 구조의 우주도 아니다. 무속신앙은 뮈토스(Mythos)를 축으로 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 자연과 인간, 개인과 집단, 현세와 내세,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이 선회하는 단일체제의 우주를 지닌다. 현존재로서의 인간과 상보적인 것으로 무속신앙은 영혼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영혼은 크게 나누면 생령(生靈) 사령(死靈)으로 나눌 수 있다. 생령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잠재적 가능성이지만 사령은 육신을 이탈한 것, 무형의 전지자적(全知者的) 속성을 지닌 것, 불멸하는 것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사령은 조령(祖靈)과 원귀(寃鬼)로 나누어지면서 각기 선악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령은 살아 있는 사람과의 제의적 관계에서 그 기능을 바꿀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신관, 인간관, 우주관, 영혼관을 지니고 있는 무속신앙의 구원관은 어떠한 것인가? 무속신앙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삶의 정황으로 전제하는 것은 원한이나 살이 ‘맺히고 낀’ 상태, 부정이나 동티가 ‘타거나 난’ 상태, 그리고 옴이나 귀신이 ‘붙은’ 상태들이다. 이러한 원인의 결과는 불의의 부자연스러운 죽음들, 질병, 가난, 천하게 됨, 자손없음, 천재, 화재, 수재, 심지어는 관재(官災), 구설수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정황에서 벗어나는 것, 곧 이를 신은 ‘내리고’, 귀신을 ‘쫓고’, 재앙을 ‘막아’ 풀어 가는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무속신앙에서의 구원은 현실적인 삶의 정상적인 자연스러움을 그 최선의 상태에서 누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부유함, 귀하게 됨, 많은 자손을 거느림, 가운(家運)의 번창, 몸의 건강, 수명 장수, 자손들에 의하여 위무받을 수 있는 사령, 영계에의 천도가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 등이다. 달리 표현하면 구원에의 희구는 기복(祈福)으로 나타나고, 그 복은 현실적인 육체적 실존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제의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무속신앙은 그 제의인 굿을 통하여 종교현상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굿은 기능적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분화된 굿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를 수 있으나 목적에 의하여 분류하면 대체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굿, 사령굿, 그리고 무당을 위한 신 굿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굿은 다시 정기적인 것, 수시적인 것들로 분류해볼 수도 있고

가제(家祭)와 동제(洞祭)로 나눌 수도 있다.

기주(祈主)의 요청을 무속신앙의 사제인 무당이 받아들여 집전함으로써 굿은 이루어진다. 따라서 무당은 굿의 집전자이면서 무속신앙 전체의 관리자인 사제이다. 무당은 본래 여자 무(巫)에게만 사용되는 이름이었으나 무속신앙 사제의 일반적 호칭이 되어가고 있다. 여무(女巫)에 대하여 남무(男巫)는 박수라 부른다. 이 이외에도 심방 · 만신 · 당골 등의 호칭이 있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내림굿을 치러야 한다. 이렇게 무당이 된 경우, 이를 강신무(降神巫)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강신을 위한 굿을 치르게 되는 것은 그 후보자가 무병(巫病)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독특한 질병을 앓기 때문이다. 무병은 굿을 통해 치유되는 종교체험이라는 점에서 다른 정신질환과 구별된다. 무당이 되면 그는 무의 기능을 학습하게 되고, 영력(靈力)을 지니게 되며, 특정한 신을 몸주로 모시게 되고, 굿을 관장하고 집전하게 된다. 그러나 강신체험이 없이도 무당이 되는 경우가 있다. 흔히 당골 또는 단골로 호칭되는 이러한 세습무(世襲巫)는, 강신무가 중북부 지역의 현상인데 비해 남부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무당은 혈통에 의한 무권(巫權)을 세습할 뿐만 아니라 사제의 관할권(管轄圈)도 세습한다. 이 외에도 제주도의 심방, 남부 지역의 명두는 각기 강신무나 세습무의 일부 특징들을 혼합하고 있어 또 다른 유형의 사제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굿이라는 제의의 진행을 거리라 한다. 그러므로 굿거리는 제차(祭次)를 이르는 것이다. 거리의 수와 종류는 굿 규모의 크기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바뀐다. 그러나 신을 청하는 과정, 신을 접대하고 즐겁게 하는 과정, 신을 보내는 과정 등이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주의 소청에 대한 신의 응답인 공수, 그것을 전하는 인간의 대행자이면서 신의 대행자인 무당의 탈자적 경험, 실을 위무하기 위한 노래와 춤, 제의적 신성성을 서술하는 무가(巫歌)의 음송 등이 연출되고, 명도 · 방울 · 오방장기 · 삼지창 · 무의(巫衣) 등의 무구(巫具)와 제상, 음식, 무신도(巫神圖) 등의 장식이 이용된다. 사령제인 지노귀 굿의 경우에는 사자회귀(死者回歸)의 극적인 연출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에도 사령의 역할은 무당이 담당한다.

굿의 구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초월적인 존재인 신과, 그의 대리자 또는 인간과 신과의 중개자인 무당과, 구원에의 희구를 구체화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기주와, 이러한 세 요소들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제의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관중들의 상호관계이다. 굿에서의 신의 기능은 자발적이거나 적극적이 못된다. 그는 “불려지고”, “놀려지고”, “보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신 자신이 신성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신과의 만남은 외경(畏敬)의 분위기를 낳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계율이 절대적 권위를 통하여 규범화되지는 않는다. 무당은 굿의 진행 속에서 신격(神格)의 구체화로 기능한다. 탈자적 경험은 그 구체화의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과의 관련에서 언급한다면 신은 무당 개인의 신비적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기능할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기주의 희구를 수렴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무당은 완전한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 중보적(仲保的) 성격이 일상성 속에서는 지속되지 않는다. 기주와 무당과의 관계는 당골판에서 조차 상황적 필요에 따라 생길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제의 관람자인 굿판 참여자와의 관계에서 보면 굿은 그들과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굿에서 기능하는 신이나 그 사제인 무당이나 이웃이기도 한 기주의 무속신앙의 현실은 하나의 연희적(演戱的)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당의 신적 권위에 대한 상징적 공감과 기주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상징적 공감은 굿의 현장을 종교적 정서의 자리로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무속신앙의 공동체는 제장공동체(祭場共同體)라 이름할 수 있다. 그 굿판, 곧 제장은 그 굿판의 끝남과 아울러 해체되지만 상징적 공감대의 지속은 그러한 제장의 벌림을 상황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요청할 수 있는 것으로 지속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속신앙의 또 다른 공동체로 단골판을 들 수 있다. 세습무를 축으로 한 이 단골조직은 흔히 어느 특정한 무당의 신봉자가 그 무당에게 명다리(명건, 명교)를 바침으로써 그 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무당에게 속하게 되어 필요할 때 그 무당을 찾아간다, 혹은 하나의 무당이 일정한 지역 안에 있는 무속신앙자들의 사제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두 요소가 중첩되어 이루어지는 무속신앙 공동체를 앞의 제장공동체와 구별하여 제역공동체(祭域共同體)라고 할 수 있다. 무속신앙은 아득한 옛적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기능해 온 종교적 상징체계이다. 그것은 이원적 사고나 그러한 구조에서 비롯하는 현실부정적이고 탈속적인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신성이라든가 초월이라든가 궁극성이라든가 하는 종교적 가치보다는 지금 이곳에서의 인간을 위한 ‘힘의’ 활용, 그것을 위한 ‘힘’의 위무, ‘힘’의 횡포로부터의 벗어남을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무속신앙은 그 종교적 정조(情操)의 진지성과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자기통찰의 결여, 정신적 가치보다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우선하는 일, 현실적 복락을 누리기 위한 무분별한 목적지향적 태도, 힘에 대한 아부나 힘에 의한 수탈의 가능성,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의 의식이나 역사의식의 결여 등을 낳기도 한다.

무속신앙은 한국의 역사 과정에서 각 왕조의 종교 정책에 의해서 영향을 맡아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 · 도교 등에 의하여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때로는 배척되고 또 때로는 이용당하기도 하고 보호를 받기도 하면서 무속신앙은 유교와 불교에서 제의의 구성에 커다란 영향을 입고 있다. 지노귀굿의 거리나 동제에 스민 유교적 특성, 굿거리 전체에 깃들인 불교적 요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도교는 무신(巫神)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리스도교 선교가 시작된 이래, 그리스도교는 어느 다른 종교보다도 강력하게 무속신앙에 대하여 부정적이고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무속신앙은 미신으로 단정되었고 무당과 그 신봉자는 마귀로 간주되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도 무속신앙을 혹독하게 박해하였다. 굿의 거리가 모두 행해지지 않는다던가 은밀하게 굿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때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1945년 이후에도 무속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에는 아무런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무속신앙은 부정되어야 할 그릇된 전통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신앙은 그 기본구조를 상실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속 신앙적 사유는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 등의 신앙유형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속신앙 자체에 대한 관심과 현대의 사회변동에서 어떻게 무속신앙이 전승될 것인가를 우리는 아울러 주목해야 할 것이다. (鄭鎭弘)

[참고문헌]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0 / 김열규,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일조각, 1977 / 김인회, 한국인의 가치관 – 무속과 교육철학, 문음사, 1979 / 서대석, 한국무가의 연구, 문학사상사, 1980 /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연대출판부, 1975 / 장병길, 한국고유신앙 연구,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70 / 최길성, 한국무속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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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부재 [한] 無所不在 [라] ubiquitas

≪한불자전≫(韓佛字典, Dictionnaire Coreen-Francais, 1880)에 따르면 ① 있지 않는 장소가 없다. ② 도처에, 어디에나 있음을 뜻하는 용어로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사상 초기단계부터 많이 쓰여온 말이다. 하느님의 품성(稟性)을 설명할 때 소극적인 품성의 하나인 무량(無量)과 대조되어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이 ‘무소부재’(無所不在)라는 낱말인데, 이는 ‘하느님이 어디든지 있지 않는 데가 없이 아무 데나 있음’을 또는 ‘없는 데가 없음’을 뜻하는 옛말이다. 1900년대에는 ‘무소부재’ 대신 ‘아니 계신 데 없음’으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무소부재’에 해당되는 적절한 말이 없으나 ‘신의 내재(內在)’(divine immanence) 곧 모든 피조물에 충만해 있는 신의 보편성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어디든지 없는 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신의 본질과 행동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는, 이 하느님의 ‘내재성’(內在性)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족(補足)하는 것이다. 신은 신으로서 머무르는 것이요, 세계의 일부는 아니다. 신은 세계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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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 [원] Mousset, Germain

Mousset, Germain(1876-1957).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제 2대 대구교구장. 주교. 한국명 문제만(文濟萬). 프랑스에서 출생. 1900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졸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1901년 첫 사목지인 제주도에 부임했으나 5월 신축교난이 일어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교난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한 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와 함께 목포로 피신했다가 10월에 제주도로 귀환, 다시 전교를 시작하였다. 1902년 마산본당(현 완월동 본당)으로 전임되어 성당을 신축하고 창원, 진주, 통영, 거제 등지를 전교하는 한편 1910년 현 성지(聖旨) 여중고의 모체인 성지학교를 설립했고, 1911년 대구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대구교구 당가(재정부장)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28년 대구교구 부주교를 거쳐 1938년 2월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사망하자 이해 12월 교구장(대목)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6일 주교로 성성되었고 그 후로는 대구교구의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효성(曉星)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주교관내에 루르드 성모당을 건립하였다. 1942년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교구장직을 사임당하고 광복 후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활동, 그 성과로 인해 195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1957년 6월 8일 노환으로 서울에서 사망, 대구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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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무군 [한] 無父無君

≪한불자전≫에 따르면, 무부무군이란 자신의 임금도, 자신의 아버지도 알아볼 줄 모르는 것을 가리키는 ‘욕설’로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한국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거나 그들을 처단할 때의 죄목으로 사용하여 ‘무부무군의 부도죄’(不道罪)라는 단죄용어로도 사용하였다. 천주교 박해의 원인의 하나로 집약되는 이 용어는 예를 들자면, 천주교인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 때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든지, 천주교인인 그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이 고모상 때 신주를 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폐지하였다든지 하는 것에 사실 바탕을 두고는 있으나, 교황청이 이질문화(異質文化)와의 만남에 있어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결정적인 제사 금령(禁令)을 내림으로써 당시 전통 유교사회의 박해는 자연적인 결과로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서학서(西學書)의 폐해를 지적하는 정부 당국자들은 으레 ‘무부무군’이 패륜적인 것 중의 가장 큰 골격이라고 주장, ‘척사윤음’(斥邪綸音)에서도 ‘폐제훼주’(廢祭毁主)를 ‘무부’(無父)의 불효행위일 뿐만 아니라 금수만도 못한 짓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하상(丁夏祥)은 <상재상서>(上宰相書, 1839)에서 “세상의 도리에는 높고 낮음과 일의 가볍고 무거운 사정이 있다. 한 집안에서 중한 이는 아비만한 이가 없으나, 아비보다 더 높은 이는 나라 임금이고, 임금보다 더 중한 이는 천지대군(天地大君)이신 천주이다. 아비 말을 듣고 임금의 영(令)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따라서 임금의 명을 듣고 천지 대부모의 명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가 더욱 중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는 것은 임금의 영을 짐짓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못하여 하는 일이거늘, 어찌 이것으로써 임금도 부모도 몰라본다고 하나이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대군대부’(大君大父) 즉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영신적인 의리에서 절대적인 분을 공경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충효관념은 상대성을 띠게 되었고, 이는 바로 유교사회 윤리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의 유교관념으로 볼 때는, 효도대상으로서의 부모도 없고, 충성대상으로서의 임금도 없다는 즉 충효사상이 없는 ‘무부무군지학’(無父無君之學)이 바로 서학인 양 잘못 인식하게 되었지만,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살필 경우, 교리나 교법(敎法)으로 일국의 풍속을 바꾸려는 계획이 아니요, 나라의 임금과 자신의 아버지가 있음도 알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천주를 공경하여 영혼을 구해 죽은 뒤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데 있다고 교인들은 주장하였다.

‘무부무군’이라는 용어가 엉뚱하게 천주교를 탄압하려는 박해자들의 기만정신에서 사용된 점도 있지만, 천주교의 보편성이 당시의 국교인 유교의 존재와 위정자의 정교(政敎) 일치적인 정책을 위협할 수 있고, 또 천주교의 초국가적인 위력은 장차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대립적인 개념용어로서 빈번히 이를 남용하여 천주교를 궁지에 떨어지게 만들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무부무군’이라는 욕설의 이면에서 오히려 가톨릭 교도가 ‘대군대부’를 공경하는 근본교리임을 역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단순한 유교사회의 충효관념도 형식적이고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굴레로서가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근본에 연결되도록 내실(內實) 있는 모습으로 되기를 도전 받았다고 평가할 여지마저 생긴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 교회사연구소, 서울 1982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1982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상재상서(上宰相書), 순교자와 증거자들, 서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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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지권 [한] 無謬之權 [라] infallibilitas [관련] 무류성

무류지권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법률적인 권한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교회가 신앙진리를 믿음에 있어서나 가르침에 있어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용어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와 교도권의 무류성’이다. (⇒) 무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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