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주보자료실
박해의 결과
박해의 결과 기해박해로 서울에서는 200여 명,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각각 100여 명, 강원도와 경상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54명이 참수되었고, 옥사한 이들이 60명이었다. 기해박해는 정치적인 갈등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교우의 처형은 없었고, 집권층 외에는 … 계속 읽기
박해의 과정
박해의 과정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지기 전 1838년 말부터 이미 박해는 시작되었다. 1839년 4월 우의정 이지연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 금수지교(禽獸之敎)로 규정하고 천주교 박멸정책을 건의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헌종의 대왕대비는 이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전멸시키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인류가 전멸할 것이라며 엄명을 내렸다. 이후 … 계속 읽기
기해박해(己亥迫害 )
기해박해(己亥迫害 ) ① 박해의 원인 신유박해(1801) 이후 지역적인 박해가 자주 있었으나 조선 정부는 전반적으로 천주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새로운 지도층이 출현하여 활동한 결과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신자가 증가하여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839년 헌종(憲宗) 5년에, 박해는 3월 5일(음) … 계속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