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자(編者)와 간행연대를 알 수 없는 이승훈(李承薰)의 유고문집(遺稿文集). 서명(書名) 중 ‘만천’(蔓川)은 이승훈의 별호(別號)인 듯하다. 목차(目次), 본문(本文), 발문(跋文)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잇고, 본문은 다시 ‘잡고’(雜稿), ‘시고’(詩稿), ‘수의록’(隨意錄) 등 세 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잡고(雜稿)에는 이승훈의 저술인 <농부가>(農夫歌), 이벽(李檗)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 <십계명가>(十誡命歌) · <성교요지>(聖敎要旨), 이가환(李家煥)의 <경세가>(警世歌),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등이 수록되어 있고, 시고(詩稿)에는 <청앵유의>(廳鶯有依) · <평천십이곡>(平川十二曲) · <원적산중팔경>(元積山中八景) · <복한초>(復韓草) · <설월>(雪月) 등과 잡시(雜詩) 30여수(首) 등 모두 35수의 이승훈의 시문(詩文)이 실려 있으며, 수의록(隨意錄)에는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를 다룬 창시(創始), 조선(朝鮮) 역대 왕과 왕비의 즉위 · 승하연대를 기록한 본조연기(本朝年紀) 그리고 중국 · 일본 · 유구(琉球)의 거리, 도성의 궁전, 서울에서 각 감영(監營)까지의 거리, 중국 각 성(省)의 거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말(卷末)에는 ‘무극관인’(無極觀人)이라는 필명(筆名)으로 쓰여진 발문(跋文)이 있다.
만찬미사 [라] Missa Coenae Domini [영] Mass of Lord’s Supper [한] 晩餐∼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사실과 이에 관련되는 빠스카 신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목요일 저녁 주의 만찬 시각을 택하여 만찬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은 예루살렘에서 유래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의 성주간 전례서에서 복구되었다. 이 전례서에 따라 이날 각 본당과 수도원에서 미사를 1회만 봉헌함으로써 성체성사 집전의 단일성을 강조한다.
만찬미사의 고유문은 이날 기념하는 여러 사건을 언급한다. 즉 구세주의 수난(입당송), 유다의 배반(축문), 성체성사의 건립(독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의 순명과 그의 부활(층계송),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복음), 주님을 기억하여 예를 행하라는 분부(영성체 후 축문) 등이 그것이다. 미사 후 성체를 다른 장소에 설치된 무덤제대로 옮기고 제대보를 벗기는 예절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벗은 몸을 상기시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만찬미사는 공동집전으로 봉헌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만주교구 [한] 滿洲敎區
요동(遼東) 교구라고도 하였던 만주교구는 1838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대목구(代牧區)가 되었다. 1898년 남만(南滿) 대목구가 되었고, 1946년 봉천(奉天)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만주교구의 설정은 한국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1827년 교황청 포교성은 조선 포교지의 선교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맡아 달라고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인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박해가 빈번하여 선교사의 조선 입국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에 입국 전에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나서 입국절차나 시기 등에 관해서 자세히 협의해야 하였다. 또 약속 장소인 조선 국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요동지방을 거쳐야만 했는데 요동지방에서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의 방해에 부딪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려면 우선 이 지방을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하여 대목구로 독립시킴으로써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간섭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사실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을 접수한 교황청은 1838년 만주 대목구를 신설하고 만주와 요동지방을 관할하게 함과 동시에 만주 대목구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던 것이다.
만주 [한] 滿洲
중국 동북부의 속칭으로 중국인들은 동삼성(東三省)[遼寧省, 吉林省, 黑龍省]이라고 부른다. 면적은 129만 3,341㎢이고, 주민의 대부분은 만주인이며 그 외 중국인, 조선인들도 적지 않다. 만주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38년 이 지역이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만주 대목구로 설정된 점에 비춰보아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북경 교구로 분리 독립한 만주 대목구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겨졌고, 초대 대목으로는 동 회원인 베롤(Emmanuel Verrolles)이 취임하였다. 1840년 몽고 지방이 분리되어 무원죄성모회에 위탁되었고, 1893년 만주 대목구는 봉천(奉天)을 중심으로 한 남만(南滿) 대목구,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한 북만(北滿)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만주 지방의 선교 조건은 상당히 열악하였다. 철도나 도로 등 교통시설이 빈약할 뿐 아니라 지방 관리들의 선교방해 등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난 1900년경이었다. 이 사건으로 동몽고에서는 사제 세게르(Seghers)가 순교했고,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추방당하였다. 북만주에서는 수비네(Souvignet) 등 4명의 사제가 순교하였고 성당은 파괴되었다. 남만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주교 기용(Guillon)을 포함한 1,000여명의 교인들이 순교했고, 교회가 운영하던 모든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만주 교구는 꾸준히 성장하여 1928년 치치하얼(齊齊哈爾), 의란(依蘭), 연길(延吉) 3대목구를, 1929년 쓰핑(四平) 대목구를, 1932년 푸순(撫順), 적봉(赤峰) 두 지목구를, 1937년 임동(林東) 지목구를 각각 분리 독립시켰고, 1928년 하얼삔(哈爾賓) 총대리구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1862년에서 1938년까지 76년 동안 주교가 1명에서 11명, 선교사 10명에서 268명, 신자가 6,000여명에서 18만 5,140명, 소학교가 12개교에서 163개교, 중학교가 1개교에서 7개교로 늘어났고, 만주인 사제가 100명, 만주인 수녀 144명, 성당 595개소가 새로이 탄생되었다. 1934년 교황청은 서한을 통하여 만주 전지역의 대표자로 길림교구장이었던 가스페(Augustin Gaspais) 주교를 임명하여 관할토록 하였다. 1945년 소련군이 만주로 진주함에 따라 연길의 베네딕토회와 치치하얼의 베들레헴회는 수난을 당하였다. 1946년 봉천 대교구가 설립되었고 푸순, 열하, 지린, 쓰핑, 연길 등 5대 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어 1951년에는 대교구 1개, 교구 7개, 지목구 3개 및 하얼삔 총대리구 등 12개의 교구가 설립되어 있다. 한편 1952년 만주는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은 종교문제를 지방자치에 맡겼다. 그 이후의 사정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만물진원 [한] 萬物眞原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중국 선교사 알레니(Julius Aleni, 艾儒略, 1582-1649)가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천주교의 입장에서 자연과학을 논한 것으로 1628년 북경에서 초간되었다. 1791년(정조 15년) 진산사건(珍山事件) 당시 ≪만물진원≫, ≪성교천설≫(聖敎淺說) 등의 서학서가 예산 촌민 중에서 발견되었다는 글이 홍낙안(洪樂安)의 <장서>(長書)에 나타나며 김건순(金健淳)도 1801년 의금부(義禁府)에서 ≪교요서론≫(敎要序論)과 함께 ≪만물진원≫도 읽었다고 자백하였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학자는 홍정하(洪正河)로서 ≪만물진원증의≫(萬物眞原證疑)를 저술하여 동양의 오행(五行) 사상으로 비판하였다. ≪만물진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論物皆有始 / 論人不能自生 / 論天地不能自生人物 / 論元氣不能自分天地 / 論理不能造物 / 論凡事宣據理而不可據目 / 論天地萬物有大主宰造之 / 論天地萬物主宰攝之 / 論造物主非擬議所盡 / 論天主造成天地 / 論天主爲萬有之原.
